거창국제연극제 돌아온 극단 입체 ‘한바탕 꿈’
거창국제연극제 돌아온 극단 입체 ‘한바탕 꿈’
  • 백지영
  • 승인 2024.08.04 1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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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제 만들어 30년 운영한 극단
10년 만에 무대 오르니 ‘감개무량’
새로 만든 썰매극장 “분위기 좋네”
분단 아픔 녹아…90대 관객 눈시울
“살았는지 죽었는지 적십자사 통해 수없이 행방을 수소문해도 못 찾던 내 유일한 혈육이 아프다는데! 내가 니들을 잘못 키웠구나. (…) 그날 함께 내려오지 못한 내 형제들! 평생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는 고통이 얼마나 큰 줄 아니?”

식당에 홀연히 나타난 손님이 전하고 간, 북한에 있는 동생이 아프니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70대 식당 주인장은 적금을 탈탈 깨 치료비를 마련한다. 딸과 사위는 갑자기 나타난 전령이 수상하다며 만류하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흥남 부두에서 눈물의 이별을 한 뒤 평생 가슴 속에 묻고 살았던, 그리운 가족을 살릴 수 있다는 유일한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무대 위 배우의 절절한 외침에 객석은 숙연함으로 가득 찼다. 6·25 전쟁 당시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관객들은 눈시울을 훔쳤다.

지난 1일 거창 수승대 썰매극장에서 제34회 거창국제연극제 공식 참가작인 거창 극단 입체의 ‘한바탕 꿈’이 공연됐다.

‘한바탕 꿈’은 거창 극단 입체가 지난 4월 경남연극제에서 첫선을 보였던 작품으로, 분단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을 다룬 연극이다.

북에 남은 동생을 위해 치료비를 송금하려는 식당 주인장, 잘못 들어온 팩스로 인해 간첩과 연루됐다는 의심을 사 고문받는 꽃집 사장…. 전쟁은 잦아든 지 한참이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동시대의 아픔을 그려냈다.

최근 한 군무원이 국군정보사령부 블랙요원(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요원) 명단을 유출한 사건이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만큼 작품은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관객 성명숙(93·거창)씨는 “연극이 좋아 거창국제연극제를 처음 만들 때부터 매년 보러 온다”며 “오늘 작품을 보며 18살 때 6·25 생각도 나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한바탕 꿈’은 그 작품성 외에도 여러모로 눈길을 끈 작품이었다.

특히 거창 극단 입체가 10년 만에 거창국제연극제에서 공연을 펼쳤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최근 상황이 급변하기는 했지만, 극단 입체는 거창국제연극제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체기 때문이다.

거창국제연극제는 1983년 창단한 극단 입체가 경남 연극인들과 화합하고 소극장을 활성화하겠다며 만든 ‘시월연극제’가 그 시작이다. ‘시월연극제’(1989~1993)를 시작으로 ‘거창전국연극제’(1994)를 거쳐 지난 7회째인 1995년부터는 지금의 ‘거창국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극단 입체는 ‘시월연극제’ 시절부터 지난 2018년 제30회 거창국제연극제까지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와 ㈔거창국제연극제집행위원회 일원으로서 연극제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이후 보조금 지급 문제와 상표권 분쟁 소송 등으로 거창군과 갈등을 겪으면서 한동안 거창국제연극제에서 극단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거창군이 설립한 거창문화재단이 연극제를 주최·주관하기 시작한 2021년 제31회부터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던 극단 입체는 올해 연극제를 통해 다시금 관객과 만나게 됐다.

30년간 주최·주관해 온 연극제를 떠난 지는 2018년 이후 6년 만, 연극제 무대에 오른 지는 2014년 제26회 거창국제연극제 당시 ‘오월의 석류’를 선보인 이후 10년 만이다.

‘한바탕 꿈’을 연출한 이종일 연출은 “세계 유일 분단국가에서 이산가족의 아픔 등 가족애를 짙게 그려내고자 했다”며 “연극제 발전에 힘을 보태고자 오랜만에 참가하게 됐는데, 다시 수승대에서 관객을 만나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징성 때문일까, 이날 ‘한바탕 꿈’은 기존 300석에 100석 추가한 400석의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많은 관객이 찾았다.

임현조(49·거창) 씨는“종종 공연에서 만났던 익숙한 극단 입체가 공연한다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보러왔다. 무거운 주제지만 어린 자녀들도 집중하면서 잘 보더라”며 “썰매극장은 처음인데 분위기 좋고 맘에 든다”고 전했다.

이날 공연이 진행된 썰매극장은 거창국제연극제가 올해 처음으로 선보인 공연장이다. 위천 다리 건너 캠핑장 옆, 기존에는 썰매장으로 사용되던 경사면 아래쪽에 무대를 설치하고 경사면을 따라 행사용 의자를 비치했다.

여름철 야외 공연 특성상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목에 땀이 주르륵 흘러 연신 부채질해야 하고 날벌레의 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썰매장 근처를 소나무 군락이 에워싼 덕에 돌담극장·축제극장에 비해 차량 소음 등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다만 썰매장 경사면 인조 잔디 위로 좌석을 설치한 탓에, 조용한 장면에서는 드나드는 관객이나 연극제 관계자 등의 발걸음 소리가 비교적 크게 들렸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편 제34회 거창국제연극제는 오는 9일까지 거창 수승대 일원에서 열린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지난 1일 거창 수승대 썰매극장에서 제34회 거창국제연극제 공식 참가작인 극단 입체의 ‘한바탕 꿈’이 펼쳐지고 있다. 백지영기자
지난 1일 거창 수승대 썰매극장에서 제34회 거창국제연극제 공식 참가작인 극단 입체의 ‘한바탕 꿈’이 펼쳐지고 있다. 백지영기자
지난 1일 거창 수승대 썰매극장에서 제34회 거창국제연극제 공식 참가작인 극단 입체의 ‘한바탕 꿈’이 펼쳐지고 있다. 백지영기자
지난 1일 거창 수승대 썰매극장에서 제34회 거창국제연극제 공식 참가작인 극단 입체의 ‘한바탕 꿈’이 끝난 후 배우들이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백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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