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대나무 밭 너머로 성근 바람이 계절을 몰아간다. 1933년 가을, 유학자셨던 외할아버지는 독립군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일경에 연행되셨다. 순간의 총성. 그것이 끝이었다.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 했던 그 밤은 칠흑 같은 공포였다. 행여 잘못 엮이면 해(害)를 입을까봐 이웃들마저 외면했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가정, 남겨진 어린 남매. 외할머니가 삶의 방편으로 택한 건 과방지기였다. 과방(果房)이란 잔치의 디저트를 담아내던 과일방에서 출발해 잔치 음식을 총괄했다.
예쁘게 담고 적당히 담아야 한다. 낭비해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이 과방지기의 눈썰미에 달렸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진주의 잔치에는 과방지기가 있었다. 과방지기는 음식을 주관하는 마스터 셰프다. 외할머니에 이어 어머니도 과방지기를 대물림하셨다.
뇌과학적으로 엄마의 존재는 자녀의 평생을 좌우한다. 엄마와의 따뜻한 상호작용은 옥시토신 같은 애착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안정감과 신뢰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뇌의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편도체에 저장돼 삶을 지탱하는 방패막이 되고, 감정조절과 자기통제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경이로운 일 아닌가. 세상의 모든 엄마는 얼마나 위대한가.
과방지기 엄마의 바통을 이은 나에게 엄마의 존재는 더 특별하다. 유기농 재료만을 고집하는 것은 엄마의 영향이다. 제철 재료를 강조하는 것도 엄마가 가르쳐 주신 기본기다. 바르고(正), 깨끗하고(淨), 곧고(貞), 단정하며(姃), 바로잡음(姃)은 엄마에게 배운 음식 철학이다. 속상한 일도 엄마에게 털어놓으면 편안해지곤 했다. 풀리지 않는 일도 엄마의 지혜를 빌렸다. 엄마는 최고의 솔루션을 제시해주는 멘토였다.
이제는 노환으로 기억이 희미해지신 엄마는 자주 웃으신다. 집안 대소사, 누구네 집 잔치, 분주하던 엄마의 스케줄이 이제는 휴식 시간이다. 잔치음식의 목록을 가지런히 적은 등속표도, 풀 먹인 옥양목 행주치마도 이제는 엄마의 기억 한 켠에 차곡차곡 접혀있다. 힘든 일도 다 지나간다고 다독여 주시던 엄마. 이제는 내가 내 아이들 뒤에 서있다. 엄마가 그러셨듯, 엄마 닮은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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