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는 진주에 무엇을 남겼나 [3]일대장강, 물의 도시 진주
천년 역사는 진주에 무엇을 남겼나 [3]일대장강, 물의 도시 진주
  • 임명진
  • 승인 2024.08.2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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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남강이 관통하는 진주는 물의 도시다. 단일 축제로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남강 유등축제는 임진왜란 당시에 포위된 진주성이 외부와 통신을 하기 위해 남강에 띄운 유등에서 시작했다.

남강댐은 전국 최초의 다목적 댐이다. 댐이 조성되기 전 진주는 여름철이면 남강이 범람하는 홍수 피해가 반복됐다. 그런 남강의 치수 사업이 조선 정조대왕 시절부터 제기됐다는 사실을 아는 진주시민은 많지 않다.

1796년 장재곤이라는 사람이 ‘진주 일대의 홍수 피해가 극심하니 제방을 만들고 그 수로를 사천만으로 뚫으면 13개 읍이 홍수의 위험에서 벗어나 좋은 농지로 만들 수 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황경규 진주향당 상임고문은 “비록 상소의 내용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진주 일대의 홍수 피해가 그만큼 심각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진주지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었는지를 역사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진양호 전경
진주지역 대홍수 당시 촉석루에서 빨래를 말리는 사진. 제공=윤방
1936년 병자년 홍수 당시 진주 중앙로~천수교방면.제공=윤방
◇사람·물자 나른 나룻배의 추억

현재 인구 34만의 도시인 진주에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전 오랜 시간 사람과 물자의 주요 교통수단은 나룻배였다. 남강은 그 폭이 수십여m에서 수백여m에 달했다.

지금은 종적을 감췄지만 도심 곳곳에서 나루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진주지역에는 진주성 부근의 촉석루 나루터, 상촌 나루터 등 20여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그 중 상평동 경남일보 본사 바로 앞 남강 둔치에 있던 ‘큰들(웃돌) 나루터’는 강 건너 가좌, 정촌을 지나 멀리 사천, 통영 등의 지역을 잇는 교통의 길목 역할을 했다.

진주시가 2016년 세운 표지석에는 ‘이곳에 있었던 큰들 나루터를 통해 이 지역의 과일, 채소와 강 건너 지역의 보리, 벼, 땔감 등을 가져와 물물교환하고 물자 수송도 했다. 나룻배 운행은 노와 삿대를 이용했고 홍수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면 현재의 삽과 같은 가래로 물살을 헤치면서 운행했다. 뱃삯은 마을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람과 적게 이용하는 사람의 차이를 뒀으며, 주민들은 보리나 벼 등 양곡으로, 외지인들은 현금으로 지급했다’라고 적혀 있다.

나루터는 남강에 현대식 다리가 놓이게 되고 1969년 남강댐 건설 등으로 이용객이 줄면서 차츰 사라졌다. 그럼에도 큰들 나루터는 1980년대 초, 상촌나루터는 1998년까지 존속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진주교
 
◇배로 만든 다리, ‘뱃다리’

경남 최초의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는 진주성 앞에 놓인 진주교다. 1925년 진주에 있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일제가 성난 진주 민심을 수습하고자 1927년에 세웠다.

여러 무마책 중에서 남강 치수 사업과 진주교 가설이 있었다는 점은 당시 진주가 당면한 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진주에는 나루터와 함께 수상교통의 역할을 담당하던 배다리가 있었다. 배다리는 말 그대로 배들을 연결해 만든 인위적인 다리를 뜻한다. 진주 사람들은 ‘뱃다리’, ‘나무다리’로 불렀다.

 
1910년 대 당시 남강 배다리 모습. 자료 제공 중앙대학교 신현규 교수


배다리는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전, 1910년대 진주성 촉석루 부근에 설치됐다. 나룻배로는 물건의 수송이나 사람의 이동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배다리는 설치 과정에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오늘날 남강 유등축제 현장에는 강 건너편을 연결하는 부교가 설치되는데, 과거 배다리를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배다리는 여름철만 되면 반복되는 남강의 범람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1925년에 발생한 대홍수로 배다리가 유실되고 1927년 진주교 설치로 이어지게 된다.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진주시는 지난 2022년 진주성 부근에 물빛나루쉼터를 완공하고 남강 유람선 김시민호를 띄우고 있다.

 
진양호 댐 기념비
진양호
◇전국 최초 다목적 남강댐

남강은 진주를 살찌우는 젖줄이었다. 상류의 기름진 토사가 남강을 통해 축적되면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진주를 전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김영기 (사)경남지역사회연구원 원장은 “옛날부터 진주가 농업 관련 학교나 기관이 많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풍부한 농업생산력은 진주에 사람과 인재가 모이게 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비되지 못한 남강은 빈번한 대홍수로 진주에 큰 피해를 남겼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1925년, 1933년, 1936년에도 대홍수가 발생했으며 특히 1936년 8월의 피해는 가장 극심했다.

도심 대부분이 물에 잠기는 궤멸적인 피해를 당하자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일왕이 파견한 시종이 진주를 찾아 피해를 둘러봤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는 1936년 대홍수를 계기로 그동안 미적거렸던 남강 치수 사업에 착수했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진척을 보지 못했다. 기약이 없어 보이던 공사는 박정희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남강댐 건립 사업을 포함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남강댐은 1969년에 높이 21m, 길이 975m의 댐으로 조성됐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폭우가 자주 내리면서 1989년 보강공사에 착공해 1999년 지금의 규모로 준공됐다.

남강댐으로 조성된 진양호는 서부 경남 일대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원이지만 부산지역에 식수로 공급하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됐다.

대구, 경북을 거쳐 부산, 경남 등 6개 시도가 이용하는 낙동강에서 1991년 페놀 유출 사건을 비롯해 수질오염 사고가 잇따르자, 하류에 있는 부산은 대안으로 서부 경남 주민들이 사용하는 진주 남강과 합천 황강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다 지리산 댐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남강 물 사용은 2019년 부산시가 계획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됐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씨부인 시덕불망비
■이재민들이 이씨 부인에게 내린 ‘숙부인’ 칭호

진주에서 대안면장을 지낸 강재순의 아내인 전주이씨(1863~1916)는 ‘자비 보살’로 불릴 정도로 주민들에게 존경받았다. 1910년대 진주에 홍수와 자연재해로 많은 이재민들이 생겨나자 곳간을 열어 그들을 도왔다. 주민들은 그녀의 사후, ‘전주이씨 시덕불망비’라는 공덕비를 세웠다.

공덕비에는 ‘숙부인’이라고 새겼는데, 숙부인은 조선시대 정3품에 해당하는 관직인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역임한 관리의 아내에게 주던 작위에 해당한다. 주민들은 숙부인이라는 칭호를 새기기 위해 남편인 강재순에게 대안면장 대신 정3품 통정대부라는 벼슬을 새겨놓았다. 도움을 받았던 주민들이 그들의 공덕을 기려 관직을 내린 뜻깊은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남강 백사장에서 꽃핀 진주 씨름과 소싸움

정비사업을 하기 전 남강은 드넓은 백사장이 형성돼 있었다. 백사장에는 씨름 대회와 소싸움대회가 종종 열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했다고 한다. 진주에서 유명한 씨름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고, 오늘날 진주가 소싸움 경기의 발원지로 불리며 전용 경기장이 마련된 것도 남강의 드넓은 백사장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나루터 사진
1936년 계유년 홍수 당시 진주 중앙로~천수교방면. 제공=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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