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줌 꿈에서 큰 기업 키워낸 창업가들의 첫 경연장
LG 창업주 구인회, GS 허만정 창업주 등
지수초교, 100대 기업가 중 30여 명 배출
진주 K-기업가 정신센터 세워 가치 높여
‘대동’ 떠난 후 지역 경쟁력 구심점 아쉬움
진주의 중앙시장에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상점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진주시와 상인들이 청년 사업가로 첫발을 내딘 구인회 창업주가 1931년 당시 자본금 3800원을 가지고 포목점을 열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2023년 4월에 시장 내 상점터 자리에 설치한 것이다. 표지판에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상점터, 시대를 뛰어넘은 고객가치 경영의 발원지’라고 적혀 있다.
◇진주에서 자란 대한민국 경제인들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LG그룹, GS그룹의 창업주는 ‘진주사람’이다. LG그룹의 공동 창업자인 구인회(1907~1969), 허만정(1897~1952) 창업주는 600여 년 역사를 지닌 승산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사돈관계이다.
구인회 창업주의 경영 수완과 만석꾼으로 소문났던 허만정(1897~1952) 창업주의 지원으로 구인회 상점은 해방 이후 도청이 옮겨간 부산으로 사업체를 옮겨 1947년 현 LG화학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사를 함께 설립했다.
이후 1958년 현 LG전자인 금성사를 설립하는 등 구인회, 허만정 창업주의 끈끈한 동업 관계는 3대를 거쳐 2005년 LG그룹에서 허씨 일가의 GS그룹이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살았던 마을 부근의 지수초등학교는 양 집안의 자녀들이 다녔다.
창업주를 비롯해 오늘날 범LG가와 범GS가로 불리는 기업인이 같은 초등학교 동문이라는 점은 세계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이한 점은 의령출신인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도 1회 졸업생이라는 점이다. 승산마을의 허씨 일가로 시집온 누님을 따라 한 학기를 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1921년 개교 이래 졸업생들의 면면을 보면, 1회 구인회 럭키금성그룹 창업주, 이병주 삼성그룹 창업주를 비롯해 제3회 구철회 LIG그룹 창업주, 5회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 제7회 허학구 정화금속 창업주, 제11회 구정회 금성사 사장, 허을용 우성산업 창업주, 제12회 구태회 LS그룹 창업주, 제13회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 허옥구 부산펩시콜라 대표, 제14회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등 한국경제의 쟁쟁한 총수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을 학계에서도 주목해 2018년 7월 한국경영학회는 진주를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 수도’로 선포했다.
◇활발한 상업, 대표기업들의 탄생
진주에서 대기업 창업주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도청소재지였던 진주는 개화기 무렵부터 보부상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 보부상들을 관리하는 단체인 오늘날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진주상무사가 세워지고 그들의 활동으로 1884년에 탄생한 진주 중앙시장은 풍부한 물품과 교역으로 전국적 규모의 시장으로 급성장했다.
진주상무사는 진주 인근의 17개 지역을 관할 했으며 일제의 탄압에도 친일 인사를 배격하는 단체로 꾸려나갔다. 1936년 대홍수로 진주상무사 건물이 무너지자 중앙시장 상인들이 기부금을 모아 지금의 옥봉동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당시 포목점을 하던 구인회 창업주도 기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인회 상점이 문을 연 시기에 진주에는 동양염직소(1924), 진주제사(1925) 등 실크업체와 진주합동운수(1931), 진주곡자공업(1945), 대동공업(1947)과 같은 토착기업이 차례로 설립됐다.
진주시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함께 2022년 3월 옛 지수초등학교 부지를 리모델링해 ‘진주 K-기업가정신센터’를 개소했다.
지역 기업가들을 연구하는 이래호 박사는 “굴지의 기업가들이 진주에서 출생해서 성장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면서 “오늘날 지역 인재 양성이 강조되고 청년들의 창업과 도전 정신이 부각되는 요즘, 지역 출신의 기업가를 널리 알리고 그들의 생애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동공업의 추억…경쟁력 다시 고민해야
많은 기업가를 배출했지만 오늘날 진주의 위상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인구면에서 도내 18개 시·군 중에서 창원, 김해, 양산에 이어 네 번째에 그친다. 산업면에서도 창원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힌때 진주가 자랑했던 실크산업과 남강댐 조성 이후 풍부한 수량을 바탕으로 번창했던 제지업도 예전만 못한 실정이다.
급변하는 산업구조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수도권 집중화와 국가경제 개발의 축인 경부고속도로에서 비켜난 내륙 지방이라는 이유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나마 있던 기업들도 지역을 떠난 것이다.
많은 진주사람은 1925년 도청의 부산 이전과 함께 특히 1984년 토종기업인 농업기계 제조업체인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의 여파가 컸다고 꼽는다.
진주상공회의소가 펴낸 진주경제에 따르면 이전 직전 대동공업의 종사자 수는 7000여 명으로 진주지역 전체 공업생산량의 50%를 차지할 정도였으며 협력사들까지 합쳐 납부하는 국세와 지방세가 당시 진주시 전체 세입 금액의 44%에 달했다.
지금도 진주에는 당시 대동공업에서 근무하고, 거래하던 사람들이 독자적인 기업활동을 하고 있다.
LG와 GS 등 굴지의 기업가들을 배출했지만, 실제 진주에서 기업 경영을 하고 진주의 경제를 먹여 살린 기업은 대동공업이었다.
김중섭 경상국립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대동공업을 놓친 것은 진주지역에는 큰 타격이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대동공업 이전을 연구하고 그 평가가 시정에 반영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지역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지역의 경쟁력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허만정, 구인회 도로명 나온다
진주시는 지난 7월 허만정, 구인회 창업주가 출생한 지수면 일대의 도로에 명예도로명으로 ‘연암 구인회로’, ‘효주 허만정로’의 명칭 부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허만정 창업주는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후원했다. 특히 진주여고의 전신인 일신여고 설립을 주도했다.
구인회 창업주도 지역에 그의 호를 딴 연암도서관과 연암공과대학교를 세워 교육발전에 공헌했다.
■대동공업 김삼만 창업주
대동공업은 1947년 창업주인 김삼만(1912~1975)회장과 그의 형제들이 고향 진주에서 설립했다. 월급날에는 진주가 불야성을 이뤘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진주경제에서 차지한 비중은 독보적이었다. 1962년 국내 최초로 경운기를 생산했으며 이후 트랙터와 콤바인 등의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한국 농업 기계화를 선도했다.
김삼만 회장은 진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동공업은 그의 사후 대구로 이전해 오늘날 연 매출 1조 원대의 국내 최대 농업기계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2021년 사명을 ‘대동’으로 바꿨다.
지수초교, 100대 기업가 중 30여 명 배출
진주 K-기업가 정신센터 세워 가치 높여
‘대동’ 떠난 후 지역 경쟁력 구심점 아쉬움
진주의 중앙시장에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상점터’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진주시와 상인들이 청년 사업가로 첫발을 내딘 구인회 창업주가 1931년 당시 자본금 3800원을 가지고 포목점을 열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2023년 4월에 시장 내 상점터 자리에 설치한 것이다. 표지판에는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상점터, 시대를 뛰어넘은 고객가치 경영의 발원지’라고 적혀 있다.
◇진주에서 자란 대한민국 경제인들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LG그룹, GS그룹의 창업주는 ‘진주사람’이다. LG그룹의 공동 창업자인 구인회(1907~1969), 허만정(1897~1952) 창업주는 600여 년 역사를 지닌 승산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사돈관계이다.
구인회 창업주의 경영 수완과 만석꾼으로 소문났던 허만정(1897~1952) 창업주의 지원으로 구인회 상점은 해방 이후 도청이 옮겨간 부산으로 사업체를 옮겨 1947년 현 LG화학의 전신인 락희화학공업사를 함께 설립했다.
이후 1958년 현 LG전자인 금성사를 설립하는 등 구인회, 허만정 창업주의 끈끈한 동업 관계는 3대를 거쳐 2005년 LG그룹에서 허씨 일가의 GS그룹이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살았던 마을 부근의 지수초등학교는 양 집안의 자녀들이 다녔다.
창업주를 비롯해 오늘날 범LG가와 범GS가로 불리는 기업인이 같은 초등학교 동문이라는 점은 세계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이한 점은 의령출신인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도 1회 졸업생이라는 점이다. 승산마을의 허씨 일가로 시집온 누님을 따라 한 학기를 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1921년 개교 이래 졸업생들의 면면을 보면, 1회 구인회 럭키금성그룹 창업주, 이병주 삼성그룹 창업주를 비롯해 제3회 구철회 LIG그룹 창업주, 5회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 제7회 허학구 정화금속 창업주, 제11회 구정회 금성사 사장, 허을용 우성산업 창업주, 제12회 구태회 LS그룹 창업주, 제13회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 허옥구 부산펩시콜라 대표, 제14회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등 한국경제의 쟁쟁한 총수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을 학계에서도 주목해 2018년 7월 한국경영학회는 진주를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 수도’로 선포했다.
◇활발한 상업, 대표기업들의 탄생
진주에서 대기업 창업주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도청소재지였던 진주는 개화기 무렵부터 보부상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 보부상들을 관리하는 단체인 오늘날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진주상무사가 세워지고 그들의 활동으로 1884년에 탄생한 진주 중앙시장은 풍부한 물품과 교역으로 전국적 규모의 시장으로 급성장했다.
진주상무사는 진주 인근의 17개 지역을 관할 했으며 일제의 탄압에도 친일 인사를 배격하는 단체로 꾸려나갔다. 1936년 대홍수로 진주상무사 건물이 무너지자 중앙시장 상인들이 기부금을 모아 지금의 옥봉동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당시 포목점을 하던 구인회 창업주도 기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인회 상점이 문을 연 시기에 진주에는 동양염직소(1924), 진주제사(1925) 등 실크업체와 진주합동운수(1931), 진주곡자공업(1945), 대동공업(1947)과 같은 토착기업이 차례로 설립됐다.
진주시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함께 2022년 3월 옛 지수초등학교 부지를 리모델링해 ‘진주 K-기업가정신센터’를 개소했다.
◇대동공업의 추억…경쟁력 다시 고민해야
많은 기업가를 배출했지만 오늘날 진주의 위상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인구면에서 도내 18개 시·군 중에서 창원, 김해, 양산에 이어 네 번째에 그친다. 산업면에서도 창원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힌때 진주가 자랑했던 실크산업과 남강댐 조성 이후 풍부한 수량을 바탕으로 번창했던 제지업도 예전만 못한 실정이다.
급변하는 산업구조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수도권 집중화와 국가경제 개발의 축인 경부고속도로에서 비켜난 내륙 지방이라는 이유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나마 있던 기업들도 지역을 떠난 것이다.
많은 진주사람은 1925년 도청의 부산 이전과 함께 특히 1984년 토종기업인 농업기계 제조업체인 대동공업의 대구 이전의 여파가 컸다고 꼽는다.
진주상공회의소가 펴낸 진주경제에 따르면 이전 직전 대동공업의 종사자 수는 7000여 명으로 진주지역 전체 공업생산량의 50%를 차지할 정도였으며 협력사들까지 합쳐 납부하는 국세와 지방세가 당시 진주시 전체 세입 금액의 44%에 달했다.
지금도 진주에는 당시 대동공업에서 근무하고, 거래하던 사람들이 독자적인 기업활동을 하고 있다.
LG와 GS 등 굴지의 기업가들을 배출했지만, 실제 진주에서 기업 경영을 하고 진주의 경제를 먹여 살린 기업은 대동공업이었다.
김중섭 경상국립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대동공업을 놓친 것은 진주지역에는 큰 타격이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대동공업 이전을 연구하고 그 평가가 시정에 반영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지역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지역의 경쟁력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허만정, 구인회 도로명 나온다
진주시는 지난 7월 허만정, 구인회 창업주가 출생한 지수면 일대의 도로에 명예도로명으로 ‘연암 구인회로’, ‘효주 허만정로’의 명칭 부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허만정 창업주는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후원했다. 특히 진주여고의 전신인 일신여고 설립을 주도했다.
구인회 창업주도 지역에 그의 호를 딴 연암도서관과 연암공과대학교를 세워 교육발전에 공헌했다.
■대동공업 김삼만 창업주
대동공업은 1947년 창업주인 김삼만(1912~1975)회장과 그의 형제들이 고향 진주에서 설립했다. 월급날에는 진주가 불야성을 이뤘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진주경제에서 차지한 비중은 독보적이었다. 1962년 국내 최초로 경운기를 생산했으며 이후 트랙터와 콤바인 등의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한국 농업 기계화를 선도했다.
김삼만 회장은 진주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동공업은 그의 사후 대구로 이전해 오늘날 연 매출 1조 원대의 국내 최대 농업기계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2021년 사명을 ‘대동’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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