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는 진주에 무엇을 남겼나? [1]남강 절벽에 새겨진 의(義)
천년 역사는 진주에 무엇을 남겼나? [1]남강 절벽에 새겨진 의(義)
  • 임명진
  • 승인 2024.08.1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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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이 보여준 충과 의, 불의에 항거한 진주정신
농민항쟁, 형평, 소년운동 역사의 큰 줄기로 이어져
 
진주성 공북문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김시민 장군 동상.

 

진주의 도심에 들어서면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그 옆에 진주성이 우뚝 서 있다.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가 집약된 곳이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진주성 대첩의 영웅으로 불리는 김시민 장군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한 손엔 긴 칼을 차고 매서운 눈빛으로 손짓하는 방향이 마치 일본에 두 번 다시 이땅을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430년 전, 이 땅에서 일본과 무려 7년 동안 전쟁을 했다. 나라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울 때, 왕과 신하들은 수도를 버리고 평양, 의주로 도망을 갔지만 진주의 사람들은 진주성에서 두 번이나 결사 항전을 했다. 그 전투가 바로 진주성 전투다.

남강 상공에서 내려다 본 진주성 촉석루. 유람선 김시민호가 의암바위 인근으로 뱃길을 잡고 있다.
◇곽재우도 포기한 진주성, 그들은 왜 목숨을 바쳤나

진주성 1차 전투(1592년 10월)는 개전 초기 일본군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지던 조선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대첩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선군,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싸운 진주 사람들의 조국애와 희생은 오늘날 ‘진주정신’이라는 자긍심으로 남아 있다.

김시민, 고종후, 김천일, 최경희 그리고 수많은 진주 사람이 진주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자신들보다 10배나 많은 일본군을 맞아 항전한 그들의 희생은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패하며 상실감에 젖어 있던 조선의 혼을 일깨웠다.

특히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7월)는 복수전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작전을 지시하고, 그가 아끼던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핵심 장수와 동원한 병력만 10만에 달하는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이 병력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해 오자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군도 막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했다. 1차 전투 당시 진주성을 구원했던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조차 승산이 없다며 진주성에 들어가 항전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진주성은 물러섬 없이 열흘 동안 싸웠다. 성을 비우면 살려주겠다는 일본군의 회유에도, 심지어 명나라 조차 성을 비우라고 했지만 진주성은 의로운 죽음을 택했다. 그들의 항전은 헛되지 않았다. 비록 성은 함락되었지만, 막대한 피해를 본 일본군은 목표였던 전라도 점령을 포기하고 만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두 차례의 전투에서 진주성이 보여준 조국애와 저항정신은 오늘날 진주정신의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진주시는 2000년 진주성의 수호상으로 김시민 장군 동상을 건립했다. 논개의 동상도 비슷한 시기에 계획했지만, 당시 문화재청의 건립 예정지 불허 결정 등 여러 이유로 무산됐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종후, 김천일, 최경희 등 삼장사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진주성 안에 있는 고려 충신 하공진 사적비.

◇1000년간 이어져 온 의로운 기상

진주성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주성 안에는 고려의 충신 하공진(출생일 미상~1011년)을 기리는 사당과 사적비가 있다. 하공진은 고려 현종(992~1031) 때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협상하는 척하며 현종이 피난을 갈 수 있는 시간을 벌다가 포로가 됐다.

거란 성종이 자기 신하로 삼고자 했으나 하공진은 고려를 배신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하공진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진주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공진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은 충과 의라고 할 수 있다.

김시민, 논개, 고종후,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의 수많은 사람이 진주성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올곧은 기상은 1000년간 진주에 면면히 이어져 왔다.

진주사람들은 이러한 지역 정체성이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으로 승화되었다고 표현한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부정부패에 항거한 농민항쟁운동, 백정들의 신분 차별에 저항하는 형평운동, 소년 운동 등 굵직한 일련의 사건들이 진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이러한 일들이 진주에서 일어났던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 배경에 진주사람들이 말하는 진주정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진주정신이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난해 경상국립대학교에 진주학연구센터가 설립됐다.

김덕환 센터장은 진주정신에 대해 “진주사람들 사이에서는 널리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진주만의 독특한 문화, 정신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앞으로 진주정신의 실체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촉석루 아래 벼랑에 새겨진 ‘일대장강 천추의열’ 바위글씨.
촉석루 아래 남강에 있는 의암.
◇절벽에 새겨진 ‘일대장강 천추의열’

진주성 촉석루 아래 절벽에는 ‘진주정신’이 무엇인지 상징처럼 보여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는 글귀가 그것인데, 이 글씨는 1619년 7월 김시민 장군의 전공비 비문을 쓴 한몽삼(1589~1662년)의 서체이다.

진주사람도 아는 사람만 안다는 이 글귀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 년의 세월을 흐르리라’는 뜻으로,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기생 ‘논개’의 의로운 기상과 충절을 기리는 글이다.

이 절벽 근처에는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투신한 ‘의암바위’가 있다. 의로운 바위를 뜻하는 의암바위는 수백 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진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의암이라는 글씨는 1629년 정대륭이 새긴 것으로, 2001년 9월 경남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됐다.

‘의암’, ‘의열’이란 단어에서 ‘의(義)’가 진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진주성 촉석루 밑 절벽에는 진주의 역사적 가치가 담겨 있는 수십 개의 글귀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의로운 이들을 칭송하거나 그렇지 못한 이름도 새겨져 있다. 절벽에 새겨진 글귀가 이처럼 많이 밀집된 것은 전국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다.

이들 바위와 절벽에 새겨진 글자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풍화 등으로 퇴색되어 가고 있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 가는 진주의 정신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남강 위에서 본 진주성 촉석루 전경.

■진주성을 지킨 삼장사

고종후, 김천일은 의병장이다. 최경희는 경상우병사로 진주성 2차 전투 당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싸웠다. 이들을 오늘날 삼장사라고 부르며 그들의 충과 의를 높이 기리고 있다. 그들을 다룬 시가 전해진다.


촉석루에 오른 세 장사
한 잔 술을 들고 웃으며 남강을 가리키네
긴 강의 물은 도도히 흐르나니
물결이 마르지 않으며 혼 또한 죽지 않으리라

진주성에는 진주사람들만 싸운 것이 아니다. 부산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를 가리켜 의병장 김천일은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무진주 무호남)’고 했으며 호남 의병 상당수가 진주성에 입성해 진주사람들과 같이 싸웠다.

이전을 앞두고 있는 진주성 내 국립진주박물관 전경.
■국립진주박물관의 이전

국립진주박물관은 전국의 국립박물관 중에서 임진왜란에 특화된 박물관이다. 성안에 박물관이 있다는 것 자체도 흔치 않다.

지금의 진주성은 어쩌면 도심 속 공원과 같은 그저 익숙한 풍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성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이 곧 있으면 성 밖의 부지로 옮겨간다. 성안에 있다 보니 관람객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점도 이전을 결정한 여러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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