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기가 종이를 씹는다
이면지를 쓰면 생기는 일이다
기계에게도 추억이 있다
한 번의 만남도 만남은 만남이어서
무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질주하는 포장의 평면을 덜컹덜컹
비포장의 굴곡으로 만들며
애를 먹이는 프린터기
씹힌 종이를 뽑는다 구겨진 종이가
뭔가를 겪었다는 느낌이다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뭔가를 자기 식으로
살아냈다는 느낌이다
완행버스 타이어 바퀴라도 갈 듯
종이를 뽑는다 만남 이후의 이면엔 늘
시작점과 종착점 사이에 숨은
풍경들이 있는 것,
그걸 구름이라고 할까
빗방울이 연주하던 잎잎의
떨림이라고 할까
프린터기에 물린 종이를 편다
밥을 먹다 씹은 내 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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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기에 종이가 걸린다.
작동이 순탄하지 않다는 거다.
이면지들이 가지런하지 않았거나 압밀이 달라서
기계의 인식에서 문제가 생긴 거다.
씹힌 종이를 뽑으면 시꺼먼 활자가 구겨지고
찢겨 나오는 것이 꼭 이면지들의 항거 같다.
무작정 등 밀려 살아가는 방식의
몸부림 같기도 하고 스치면서 어딘가
한눈팔아 사고 친 그날 같기도 하고
우리의 일상에 가끔 닥치는
트집이나 몽니 같기도 하다.
스쳐 간 것들에 대한 관심.
그러는 것이 기계나 사람이나 다 똑같다.
고장은 문득 과정을 되돌아보게 하고
예사로운 애정도 요구한다.
경남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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