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5)
[특별기획] 그날을 기억하며-진주성 2차 전투(5)
  • 임명진
  • 승인 2019.07.09 2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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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뿐이다"
“항복하라. 지원군은 없다”
 
진주성을 공격하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 진주성합전지도(월광방년화)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에는 관군과 의병 사이에 일정하게 역할 분담이 이뤄져 성의 안과 밖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함으로서 일본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진주성 2차 전투는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관군과 의병이 모두 성 안에서 수성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1차 진주성 전투와는 달리 외부에서의 의병의 응원과 관군의 구원이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이 계속 펼쳐졌다.

연일 진주성의 상황이 급보로 올라갔지만 기다리던 지원군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적의 예상 진입로에 뿌려 놓아 적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사용했다. 철질려라고도 한다. 마름쇠의 날에 독약을 섞어 놓기도 하고 5~6개를 줄에 하께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적의 공격을 패퇴시키다

밤낮으로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했다. 6월23일 낮에만 3차례의 공격을 시도한 일본군은 밤이 되자 다시 어둠을 틈타 일제히 공격을 재개했다.

일본군의 조총과 조선군의 대포와 화살이 서로 빗발쳤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했다. 낮부터 시작된 전투는 하루를 넘겨 계속됐다. 진주성의 안과 밖에는 총과 화살에 맞아 죽은 자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다음날이 밝아오자 적의 병력 5000~6000여 명이 마현에 진을 치고, 또 일단의 병력은 성의 동편에 진을 쳤다. 압도적인 적의 병력도 단단한 진주성의 방어를 쉽사리 뚫지 못했다.

공성무기를 동원한 연일 계속되는 일본군의 파상공격을 진주성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조선군과 일본군의 교전은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25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을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조총을 쏘아 댔다. 이에 대항해 충청병사 황진이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기 시작했다.

황진은 밤늦게까지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진 채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백성과 군사들이 감격해 힘을 다해 언덕 쌓는 일을 도왔다. 백성들이 힘을 보태자 언덕은 하룻밤 사이에 완성됐다.

황진은 이곳에 현자총통을 설치하고 적이 만든 언덕을 향해 쏘아대니 적의 진지가 파괴됐다. 하지만 파괴된 진지는 적이 곧바로 수리하면서 언덕을 사이에 둔 공방전은 계속됐다.

이날 적은 낮에만 3차례 공격을 시도했다. 야간에도 4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조선군에게 패퇴 당했다.

적의 맹공에도 진주성의 관군과 의병들은 죽기로 싸웠다. 일본군은 성벽에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거치고 올라가려고 했지만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번번이 실패했다.

26일이 되자 다급해진 일본군은 새로운 무기를 동원했다. 수레에 나무로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을 씌운 귀갑차를 밀고 성벽 근처까지 와서 화약을 터트렸다. 성벽에 큰 충격을 가하는 귀갑차에 놀란 조선군은 화살을 쏘았으나 생가죽을 뚫지 못했다.

성벽에서 큰 돌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끓는 물을 쏟아 부으니 적이 물러갔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일본군 수십 명이 쇠갑옷을 입고 귀갑차를 성 아래로 밀고 들어가 방어막을 구축한 뒤 그 안에서 쇠송곳으로 성을 뚫거나 담 밑을 굴착하기도 하고, 또는 성벽의 초석을 잡아당겨 빼내는 등의 작업을 시도했다. 설상가상으로 장마철에 진주성의 지반이 약해지면서 성벽일부가 무너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과 칼. 일본군은 전투에서 조총과 도검은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오랜 내전을 거친 일본은 조총과 도검이 명과 조선보다 발달했다. 일본군은 조총부대와 함께 긴 창과 큰 칼 등 창검으로 무장한 무사를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전시


◇일본, “항복해라, 지원군은 없다”

여기에 주목할 기록이 있다. 1차 진주성 전투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의 뛰어난 전략과 통솔력으로 거둔 승리인데 반해 패전으로 끝난 2차 전투에서의 진주목사는 상반된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는 26일 김천일이 진주목사 서예원을 전격 경질하고 의병장 장윤을 임시목사로 선임했다고 적고 있다. 문헌에 남겨진 여러 기록대로라면 진주목사 서예원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구보다 진주성의 지형과 지리를 잘 아는 진주목사가 전투 도중에 경질됐다는 점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전투 도중에 지휘관을 바꾸는 일은 여간해서는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 진주성 함락의 원인과 공로를 평가하는 과정에 조정의 남인과 서인 등 당파적 색채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시 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유성룡의 저서, ‘징비록’은 서예원에 대한 평가와 함께 진주성 전투 당시의 창의사 김천일과 의병들의 활약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기술하고 있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1차 전투때 진주목사 김시민이 전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에 비해, 2차 전투는 그보다 상급자인 경상우병사 등이 성안으로 들어와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 점에서 1차 전투 당시와 2차 전투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들게 한다”고 말했다.



 
조선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화포다. 다양한 화포는 압도적인 일본군의 병력을 막아내는 강력한 무기였다. 크기별로 화약의 양과 사거리가 달랐다. 국립진주박물관 전시


벌써 몇 일째 계속되는 총공세가 번번이 무산되자 일본군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글을 성중에 던지며 항복을 종용했다.

진주성이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을 간파한 일본군은 기다리던 지원군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성안의 백성들을 모두 도륙하는 것은 너무나 참혹한 일이다. 장수를 보내 강화를 청하면 군사들과 백성들의 생명은 보전하겠다. 강화할 뜻이 있으면 전립을 벗어 표시하라’-적장 우키타 히데이



진주성의 반응은 단호했다.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뿐이다. 너희는 명심하라. 구원군이 오면 너희들을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의병장 김천일



26일 하루에만 주·야간 7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장마철에 비까지 크게 내려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리고 병사들도 잇따른 전투에 지쳐갔다.

최영창 국립진주박물관장은 “조선군도 일본군에 맞서 성안에 토산을 쌓고 현자총통으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다 큰 비로 활과 화살이 모두 느슨해져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등 장마로 인한 조선군 전력의 손실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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