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기행 (89) 가야산 백련암 가는 길
윤위식의 기행 (89) 가야산 백련암 가는 길
  • 경남일보
  • 승인 2017.01.0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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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청아하여 세속의 소리를 잊게 하고 솔바람 청량하여 헝클어진 상념을 가다듬게 하며 송진내음 향긋하여 번민에 찌든 때도 헹궈내는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에 올라서 고운 최치원 선생의 체취라도 느껴보고 가야산 솔 숲길을 걸어올라 백련암 찾아들어 성철 스님의 유훈이라도 되새겨볼 요량으로 신년 첫 출행에 나섰다.

12번 고속도로 해인사 IC 앞을 지나 해인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5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월광리의 작은 교차로에 닿았다. 해인사로 가려면 곧장 가야 하지만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여 가야천을 가로지른 월광교 건너편의 월광사지 3층 석탑을 찾았다. 5분이면 들였다 갈 수 있지만 한나절을 바라봐도 못다 푼 애한을 달래기에는 한 맺힌 설움이 가슴을 후비는 애절한 역사의 숨결이 천오백년의 길고긴 세월 속에 곤하게 잠들어 있는 월광사지의 동서 3층 석탑이다. 탑신도 웅장하고 외양도 수려한데 찾는 이가 없어선지 버려진 듯 외진 곳에 없는 듯이 마주서서 외로움을 달래는지 낙락장송 그늘아래 처량히도 적적하다.

그 옛날의 월광사는 흔적조차 없어지고 근작의 작은 절집이 옛이야기를 간신히 이어오고 있는데 안내문 몇 줄에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인 월광태자가 신라에 패망하자 승려가 되어 이곳에다 절을 지어 월광사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며 높이 5.5m의 전형적인 신라 탑의 모습으로 보물 제129호라고만 달랑 적혀 있지만 대가야의 찬란했던 문화와 16대 왕조 520여년의 종묘사직을 신라에 빼앗기고 면류관도 벗어두고 곤룡포도 벗어놓고 등극하실 귀한 몸에 먹장이 웬 말이며 구중궁궐 문무백관 어진백성 모두 잃고 물을 적셔 삭발하던 태자의 심경은 어떠하였으랴.

오백여년 종묘사직 일장춘몽 꿈이던가,

만조백관 어디 두고 먹장삼이 웬 말이오.

한이 맺혀 돌이 됐나 서러워서 탑이 됐나,

가야산 외진 자락에 돌탑으로 섰구나.

언제나 두고 떠나기 아쉬워서 지극한 마음으로 합장의 예를 올리고 다시 해인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겨울의 평일이라서인지 북적거리던 대장경테마파크도 휑하니 비어 있고 홍류동 계곡의 들머리에서 시작되는 ‘소리길’도 걷는 사람이 없어 그저 한적하기만한데 낙락장송이 우거진 작은 고갯마루에 ‘해인성지’라고 음각된 커다란 바윗돌이 속객을 영접한다.

카랑카랑한 계곡물 소리는 골짜기를 울리고 향긋한 송진내음이 오지랖에 배어드니 고운은 세속의 소리를 홍류동 계곡물 소리로 씻으려고 함이던가, 난초지초 뿌리내린 기암괴석 벼랑에다 칠언절구 시를 쓰며 세파에 찌든 때를 솔향기로 헹구려고 가야 매화 양 대산이 어우러진 깊은 골을 온다간다 말도 없이 찾았더란 말인가. 노송이 우거진 가지 끝 사이로 파란 천공이 더없이 맑은데 기기묘묘한 바윗돌을 휘감고 흐르는 물소리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빗돌이 선 언덕 위의 가야서원에서 글공부에 여념이 없는 서책 읽는 소리인지 낭랑하고 청아하여 세상사에 응어리진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틔어준다.

 
 


고운은 세속과의 연을 끊고 계곡을 건넜건만 세인은 고운을 못 잊어 당초에 없던 다리를 좁다랗게 이었다. 고산준봉 깎아지른 바위 끝의 틈새마다 낙락장송 푸른 솔이 고고한 자태이고 기암괴석 벼랑 아래 반석 위로 물 흐르고 노송이 그늘을 지운 바위 위의 작은 정자, 누가 그린 수묵화를 홍류동 계곡에다 하늘 가득히 걸었을까. 바라보는 농산정이 황홀경을 이루니 신선들의 별서인가 선녀들의 별당인가, 고운의 체취 서린 홍류동의 비경이요 세속을 멀리한 선경이요 절경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서 홍류동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풍광의 황홀경에 흠뻑 젖으며 낙락장송의 노송들이 빼곡한 길을 따라서 성보박물관 아래의 작은 주차장에 닿아 차를 세웠다. 건너다보이는 매화산의 크고 작은 봉마다 삐쭉삐쭉 날을 세운 깎아지른 바위들과 틈새마다 푸른 솔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병풍 속의 그림같이 황홀경을 펼쳐낸다. 언제 보아도 가슴을 시리게 하는 비경을 병풍 삼아 등지고 백련암을 찾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을 따라 해인사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즐비한 암자들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뭇가지처럼 그려져 백련암까지는 600m라고 일러주는 바윗돌이 ‘김영환장군 팔만대장경수호비’ 앞에서 길마중을 나와 섰다.

백련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차가 오를 수 있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구불구불 이어지더니, 국일암을 지나 회랑대와 지족암을 알리는 갈림길에서부터 발아래의 계곡은 점점 깊어만 가고 경사도 가파르게 비탈을 이루며 소나무 숲은 더욱 짙어만 갔다. 산사로 이어지는 겨울 한낮의 산길은 정적만이 깊은데 희끗희끗한 기암괴석의 커다란 바위들이 소나무 숲속의 여기저기서 힐끔힐끔 내려다보며 속객의 입산을 지켜보고 섰다. 한참을 오르자 고산중봉을 등받이로 삼고 높다란 축대 위로 기와지붕의 용마루가 어긋어긋하게 보이며 찻길은 축대 아래의 주차장에서 똬리를 틀어버리고 비탈진 옛길은 모가 닳아서 세월의 흔적을 물씬 풍기는 층층석계가 백련암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대문으로 이어졌다.

대문을 들어서자 커다란 2층 건물이 백련암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앞을 막아서, 높고 긴 돌담장을 돌아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위에 네모난 커다란 바윗돌이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기이하게 섰다. 좌로는 2층의 적광전이 높다랗게 자리를 잡았고, 이어서 고화실, 좌선실, 원통전, 정심당이 마당 가장자리에 둘러앉았는데 뒤로는 2층 전각인 고심원이 묵직하게 앉았다.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정심당의 주련이 끝 간 없이 들쑤시고 헝클어 놓은 오늘의 정치사를 준엄하게 꾸짖는 것만 같아 착잡한 마음으로 원통전의 관음보살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고 뒤편의 고심원으로 들어섰다. 육환장을 쥐신 성철 스님께서 불단 위의 법좌에 생전의 모습대로 앉아 언제나처럼 먼 곳을 바라보시는데 오늘따라 세상사가 염려되시는지 입을 굳게 다무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헌향의 예를 올리고 문을 나서니 저무는 저녁 해가 매화산 준봉 위에 시름겹게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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