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달이 사랑한 전쟁터
[경일춘추]달이 사랑한 전쟁터
  • 경남일보
  • 승인 2024.06.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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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 시인
이필 시인


방향을 찾고 싶다면? 울주 암각화를 보러 가라. 삶이 백지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발견은 기회이다. 암각화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빈 서판’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그리는 일이다. 울주군 천전리 바위 앞에서 두꺼운 책을 마주한다. 신석기에서 신라시대까지 수천 년간 새겨넣은 무늬가 바위그늘에 있다. 각석(刻石)혹은 명문(銘文)이다.

그런데 이 글은 너무 느려서 차라리 중력응집에 더 가깝다. 바람에 녹색으로 뒤틀린 낙락장송과 그 위로 낮은 햇빛이 춤추며 잎사귀 무늬를 뒤쫓고 있는 작은 언덕. 바위에는 작은 나무가 서 있고 줄기는 늙고 지친 개처럼 휘어 있다. 강가에는 공룡 발자국 밑으로 태고의 석리(石理)가 “이것은 꿈이 아니라 대홍수였다”고 말하듯 계곡물이 뱀 비늘을 떨구듯 흐른다.

암각화는 세계들 사이의 ‘포털’이다. 소용돌이무늬가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가닿는 차원의 문이라면? 길고 구불구불한 천전리 계곡은 하나의 튜브처럼 고밀도의 구멍을 만든다. 결계를 지우며 빠르게 사라지는 사슴처럼 계곡에 투사된 대지모신의 얼굴을 친견한다. 멀리 대운산 산주름이 그려낸 초상이다. 꿈이 밖으로 뛰어올라 외치는 미지의 지각층. 암각화를 쫓는 이에게 이것은 난해한 본문 일부를 잃어버린 신앙과 같다. 모든 괄호는 열려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꿈에서 꿈이 싹튼다.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잠들어 있고, 밤도 아닌 낮도 아닌 둘 다인 세계. 시작은 구멍이었다. 뛰어들었지만 착륙하지 못했다.

암각화는 스포일러다. 선사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삶을 거꾸로 읽기는 아주 쉽다. 마지막 장은 첫 장으로 읽히고, 때로는 이것이 유일한 페이지다. 마지막 장이 없으면 첫 장도 읽을 수 없다. 마름모, 소용돌이, 사슴, 우주뱀, 샤먼의 얼굴… 이 모든 무늬는 어쩌면 죽음에 대항하는 주술 아니었을까.

이제 삶은 노예들이 세운 스핑크스와 같고 죽음은 약속의 땅이다. 무수한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시간이 갈라지고 갈림길에서 나는 너의 적이 된다. 아버지 갈문왕을 잃은 소년 심맥부지(훗날의 진흥왕)는 이 바위 앞에서 정복왕으로서의 결기를 다진다. 그리고 진흥왕대에 이르러 삼국은 정복 전쟁으로 격화된다.

자기 자신의 신화는 어디에서 끝나고 시작되는가? 돌이켜보면 달이 사랑한 것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표지판은 있지만 그 표지판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누가 알겠는가? 신화는 무엇이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의 이야기 중 어느 것이 현실에서 사실이 되고 어느 것이 이야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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