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 속에 한 사나흘쯤 갇혀 있다 왔으면 싶었다. 한 생을 묶여 살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나무의 푸르름을 닮으며 채우러 가기보다 비우고 오는 길로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떠난 곳이 지리산 칠암자였다. 그곳은 지리산에 숨어 사는 7개의 수행처다. 함양 마천과 남원 산내에 걸쳐 있는 삼정산을 중심으로 실상사와 부속 암자 약수암 그리고 삼불암과 문수암, 상무주암을 지나 영원사와 도솔암까지 절집과 암자를 아우르는 수행과 은둔의 길을 이름하여 칠암자 길이라 부른다.
바랑 하나 메고 도솔암에 오른다. 완만한 숲을 지나 1시간 미음완보하며 올라서니 천상의 수행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스님께 합장하고 가쁜 숨을 삼소굴 마루에 던져둔 채 부처님을 알현한다. 5월엔 꽃잔디가 예쁜 도솔암은 혜암스님의 현판이 걸려 있을 만큼 유서 깊은 암자다. 풍경 너머로 지리산이 너울거리고 속세와 단절된 듯 바람도 독경이다. 번뇌를 씻어내기에 좋은 도솔암에서 과일 공양을 받고 바랑 속에 향불 한 줌 넣어 칠암자 여정을 시작한다.
돌아 내려와 산중 가람 영원사로 올라선다. 영관, 휴정, 유정 같은 선사들이 거쳐 간 큰 사찰이다. 아내는 유독 산신각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산처럼 넉넉하고 굳건하게 살아가기를 비는 그녀만의 의식이다. 백무동을 넘어 켜켜이 쌓인 지리 능선이 불경처럼 한 겹 두 겹 진리를 펼친다. 영원할 것 같지만 찰나인 게 인생이다. 단풍이 물들 때 영원사 진입로는 노을강처럼 은은하다. 먹먹할 만큼 침묵이 맛있는 영원사에 말없이 걸어가 안기고 싶다.
30여 분 느릿느릿 올라서면 빗기재다. 상무주암으로 가는 숲길은 새소리를 닮아 아담하다. 전망 바위에 올라서니 바래봉에서 만복대까지 서북 지리가 담장처럼 펼쳐진다. 커피 한 잔이 꿀맛이다. 암릉을 헤집고 내려서니 상무주암이 혜성처럼 나타난다. 머무름이 없는 자유로운 선계다. 산문은 늘 잠겨 있지만, 오늘은 운이 좋다. 마루에 앉아 노스님과 나란히 망망대해를 말없이 바라본다. 노구임에도 쩌렁쩌렁한 내공이 엿보인다. 각운의 사리가 모셔진 삼층석탑 너머 채소밭이 푸르다. 시원한 약수 한 모금 마시니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무디어진다.
긴 내리막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딛고 서니 망망대해 일엽편주 문수암이다. 북동으로 부처를 모신 문수암은 마천과 금대산 너머 합천의 너른 땅들이 협시보살처럼 마당에 들어온다. 조망 맛집의 성지요 절해고도다. 도봉스님이 해인사로 떠나시고 처사님이 수행 중이다. 임란 때 천명의 사람이 피신했다는 천인굴이 유명한 문수암에서 나는 예전에 당귀 나물 반찬을 많이 공양받았었다. 그 고마움에 스님께 상비약을 챙겨드린 인연이 있어 애착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숲 바다가 보이는 이곳 해우소는 통창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근심을 말끔히 풀어주는 이색 명당이다. 전망대에 앉아 오찬을 즐긴다. 바람과 풀 향이 반찬이 되는 천상의 뷔페 문수암은 근심을 털어내기에 아늑하고 좋은 곳이다.
숲이 우거진 너덜을 비스듬히 내려서면 삼불암이다. 반가움에 시작된 스님의 강의가 의욕을 넘어 견성골과 도마마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황토로 지은 산신각과 정원의 조각들이 화사한 삼불암은 암주의 잦은 변경과 중수를 거친 사연 많은 암자지만 고즈넉하게 밤별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아 묵은 마음 씻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삼정산 능선 끝자락에서 물맛이 일품인 약수암을 만난다. 빛바랜 단청이 홀가분하게 서서 곰삭은 풍경을 뱉고 있다. 실상사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임도를 따라 쉬엄쉬엄 1시간쯤 내려서면 대가람 실상사다. 텅 빈 바랑만큼 가벼워진 마음이 먼저 뛰어가 석탑 위를 유영하고 있다. 15여㎞에 이르는 대장정은 삶의 등불 하나씩 챙겨오는 순례길이다. 무거운 마음 암자에 맡겨놓고 비우며 내려오는 패러글라이딩이다. 뻐근한 발목을 만수천에 담그니 더 이상 지고 갈 짐이 없어졌다. 고픈 배를 채우러 다시 속세로 떠나는 길, 윤회의 하루가 저문다.
이용호 시민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바랑 하나 메고 도솔암에 오른다. 완만한 숲을 지나 1시간 미음완보하며 올라서니 천상의 수행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스님께 합장하고 가쁜 숨을 삼소굴 마루에 던져둔 채 부처님을 알현한다. 5월엔 꽃잔디가 예쁜 도솔암은 혜암스님의 현판이 걸려 있을 만큼 유서 깊은 암자다. 풍경 너머로 지리산이 너울거리고 속세와 단절된 듯 바람도 독경이다. 번뇌를 씻어내기에 좋은 도솔암에서 과일 공양을 받고 바랑 속에 향불 한 줌 넣어 칠암자 여정을 시작한다.
돌아 내려와 산중 가람 영원사로 올라선다. 영관, 휴정, 유정 같은 선사들이 거쳐 간 큰 사찰이다. 아내는 유독 산신각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산처럼 넉넉하고 굳건하게 살아가기를 비는 그녀만의 의식이다. 백무동을 넘어 켜켜이 쌓인 지리 능선이 불경처럼 한 겹 두 겹 진리를 펼친다. 영원할 것 같지만 찰나인 게 인생이다. 단풍이 물들 때 영원사 진입로는 노을강처럼 은은하다. 먹먹할 만큼 침묵이 맛있는 영원사에 말없이 걸어가 안기고 싶다.
30여 분 느릿느릿 올라서면 빗기재다. 상무주암으로 가는 숲길은 새소리를 닮아 아담하다. 전망 바위에 올라서니 바래봉에서 만복대까지 서북 지리가 담장처럼 펼쳐진다. 커피 한 잔이 꿀맛이다. 암릉을 헤집고 내려서니 상무주암이 혜성처럼 나타난다. 머무름이 없는 자유로운 선계다. 산문은 늘 잠겨 있지만, 오늘은 운이 좋다. 마루에 앉아 노스님과 나란히 망망대해를 말없이 바라본다. 노구임에도 쩌렁쩌렁한 내공이 엿보인다. 각운의 사리가 모셔진 삼층석탑 너머 채소밭이 푸르다. 시원한 약수 한 모금 마시니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무디어진다.
긴 내리막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딛고 서니 망망대해 일엽편주 문수암이다. 북동으로 부처를 모신 문수암은 마천과 금대산 너머 합천의 너른 땅들이 협시보살처럼 마당에 들어온다. 조망 맛집의 성지요 절해고도다. 도봉스님이 해인사로 떠나시고 처사님이 수행 중이다. 임란 때 천명의 사람이 피신했다는 천인굴이 유명한 문수암에서 나는 예전에 당귀 나물 반찬을 많이 공양받았었다. 그 고마움에 스님께 상비약을 챙겨드린 인연이 있어 애착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숲 바다가 보이는 이곳 해우소는 통창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근심을 말끔히 풀어주는 이색 명당이다. 전망대에 앉아 오찬을 즐긴다. 바람과 풀 향이 반찬이 되는 천상의 뷔페 문수암은 근심을 털어내기에 아늑하고 좋은 곳이다.
숲이 우거진 너덜을 비스듬히 내려서면 삼불암이다. 반가움에 시작된 스님의 강의가 의욕을 넘어 견성골과 도마마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황토로 지은 산신각과 정원의 조각들이 화사한 삼불암은 암주의 잦은 변경과 중수를 거친 사연 많은 암자지만 고즈넉하게 밤별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아 묵은 마음 씻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삼정산 능선 끝자락에서 물맛이 일품인 약수암을 만난다. 빛바랜 단청이 홀가분하게 서서 곰삭은 풍경을 뱉고 있다. 실상사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임도를 따라 쉬엄쉬엄 1시간쯤 내려서면 대가람 실상사다. 텅 빈 바랑만큼 가벼워진 마음이 먼저 뛰어가 석탑 위를 유영하고 있다. 15여㎞에 이르는 대장정은 삶의 등불 하나씩 챙겨오는 순례길이다. 무거운 마음 암자에 맡겨놓고 비우며 내려오는 패러글라이딩이다. 뻐근한 발목을 만수천에 담그니 더 이상 지고 갈 짐이 없어졌다. 고픈 배를 채우러 다시 속세로 떠나는 길, 윤회의 하루가 저문다.
이용호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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