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주 산청고 1학년
음,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제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제게는 같은 중학교를 나와 유독 가깝게 지내오던 동갑내기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뭐, 심심하면 서로 집에 급작스레 방문해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사이였달까요. 그 정도로 친했던 친구였습니다. 분명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괜찮았어요. 서로 보여줄 건 다 보여준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시잖아요. 대한민국 교육열 장난 아닌 거.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니 확실히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각자 공부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도 1학년 첫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니 서로 시간적 여유가 되더라고요. 때는 마침 장마가 시작되던 시기였어요. 끊임없이 몰아치는 비와 매정하게 불어대는 바람. 그런 날씨에 뭣하자고 밖으로 나갈까 싶겠지만 이때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내로 놀러 갔죠. 방 탈출 카페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영화도 보고... 정말 재밌었는데.
통금 시간이 코앞이지만 그날은 괜히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었어요. 곧 집 앞 공원 그네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까먹으며 입 좀 털었죠. 여름이란 자고로 비의 계절, 눅눅하고 습한 계절, 보기보다 낡은 그네에 허벅지 살이 달라붙곤 해서 기분 나쁜 계절. 여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습도와 감촉이 나쁘게 기억되지는 않았습니다. 외로운 가로등 불빛 아래 기름칠이 필요해 보이는 그네의 쇳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던 중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야야, 이게 뭔지 맞춰봐.”
“뭔데? 약?”
“무슨 약이~게?”
“내가 약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아냐?”
나 참, 웬 원형의 하얀색 약이 담긴 통을 짤짤 흔들며 하는 말이 고작 ‘무슨 약인지 맞춰보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친구입니다. 친구는 저를 바라보며 참 짓궂게도 미소 지어 보였어요. 워낙 목소리가 커서 그런가 웃는 소리도 우렁차더라고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눈초리를 받을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만, 친구의 미소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조금씩 새어 나왔습니다.
“공부 잘하는 약!”
“엥? 그런 약도 있어?”
“겠냐?”
저는 시답잖은 친구의 말장난에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박아버리겠다는 기세로 친구를 노려보았습니다. 친구는 제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세차게도 웃었죠. 이젠 그냥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니까요. 하지만그 웃음도 싫지 않았어요. 분명.
“정확히는 ADHD 치료제래.”
“ADHD? 너...”
“내가 ADHD인 건 아니고~ 약 효과 중에 주의력 높여주는 게 있대서.”
“ADHD 질환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부로 먹어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치료제인데 나쁜 게 들어갔겠어?”
“그런가...?”
“마침 엄마도 함 먹어보래서 다음 시험 기간부터 먹어보려고!”
조금 위험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제가 참 어리석게도, 저는 친구를 말리지 않았어요. 저도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길까, 아무 일 없겠지, 그냥 주의력만 높여준다니까, 어머니께서도 먹어보라 했다니까. 이런 안일한 생각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저의 착오였더라고요. 친구는 시험이 다가올수록 상태가 나빠져갔습니다.
평소에 잘 아프지도 않는 애인데,
“하... 진짜 어쩌지.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아주 잠깐 아프고 말겠지.’
누우면 거의 5분 만에 잠드는 애인데,
“잠이 안 와서 밤을 샜는데, 너무 피곤해...”
‘곧 있을 시험이 많이 긴장되나 보지.’
평소에 화도 잘 안 내는 애인데,
“아 짜증 나!!!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던가!!!”
‘...’
‘쟤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하는 건가?’
친구의 변화를 못 알아차리지는 않았습니다. 못 알아차리는 게 더 이상하겠죠.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하지만 친구의 투덜거림은 날이 갈수록 불평처럼 느껴졌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어주며 맞장구치는 일이 점차 귀찮게 여겨졌어요. 그때 친구의 투덜거림을 잘 들어줬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의 저는 친구의 심정마저 헤아려 볼 재간이 되지 않았어요. 당장 제 앞에 닥친 시험이 더 중요했습니다. 물론 핑계라면 핑계겠죠. 네, 이기적이게도 말이에요.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제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주현!!!”
저는 친구의 이름을, 주현이의 이름을 힘껏 내질렀습니다.
“대체 왜 그래?! 너 지금 시험기간이라 많이 힘들어 보이길래 그냥 넘기려 했어! 그런데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너 진짜 이상하다고!!! ADHD 치료제인가 뭔가 하는 약 먹고 나서부터!!!”
기어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까지, 많은 생각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진심이니까, 주현이라면 제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어보기로 했어요. 하지만 제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주현이는 머리에 무언가를 맞은 것과 같은 멍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눅눅한 여름의 짙은 녹색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여름이었습니다.
그날의 뒷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 지금으로써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날 이후로 주현이를 다시 한번 더 볼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작 그런 약 하나로, 보잘것없는 하얀색 약 하나로 주현이와 멀어졌다는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요.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걸까, 내가 이제 싫어진 걸까... 물론 누군가는 주현이의 잘못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잘못도 명백히 있다고 봐요. 주현이의 변화를 안일하게 여겼던, 주현이의 행동에 관해 화만 내던, 무너진 관계를 개선하고자는 마음을 먹지 않았던 제 잘못도 있는 거죠.
이런, 사족이 길었네요. 여하튼 바라고 있습니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먼 훗날 누군가도 저희와 비슷한 곤경에 처해있다면, 현재에 분노하기보다는 미래에 관한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저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애초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아시잖아요. 대한민국 교육열 장난 아닌 거.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니 확실히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각자 공부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도 1학년 첫 기말고사를 마치고 나니 서로 시간적 여유가 되더라고요. 때는 마침 장마가 시작되던 시기였어요. 끊임없이 몰아치는 비와 매정하게 불어대는 바람. 그런 날씨에 뭣하자고 밖으로 나갈까 싶겠지만 이때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내로 놀러 갔죠. 방 탈출 카페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영화도 보고... 정말 재밌었는데.
통금 시간이 코앞이지만 그날은 괜히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었어요. 곧 집 앞 공원 그네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까먹으며 입 좀 털었죠. 여름이란 자고로 비의 계절, 눅눅하고 습한 계절, 보기보다 낡은 그네에 허벅지 살이 달라붙곤 해서 기분 나쁜 계절. 여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습도와 감촉이 나쁘게 기억되지는 않았습니다. 외로운 가로등 불빛 아래 기름칠이 필요해 보이는 그네의 쇳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던 중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야야, 이게 뭔지 맞춰봐.”
“뭔데? 약?”
“무슨 약이~게?”
“내가 약사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아냐?”
나 참, 웬 원형의 하얀색 약이 담긴 통을 짤짤 흔들며 하는 말이 고작 ‘무슨 약인지 맞춰보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친구입니다. 친구는 저를 바라보며 참 짓궂게도 미소 지어 보였어요. 워낙 목소리가 커서 그런가 웃는 소리도 우렁차더라고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눈초리를 받을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만, 친구의 미소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조금씩 새어 나왔습니다.
“공부 잘하는 약!”
“엥? 그런 약도 있어?”
“겠냐?”
저는 시답잖은 친구의 말장난에 말해주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박아버리겠다는 기세로 친구를 노려보았습니다. 친구는 제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세차게도 웃었죠. 이젠 그냥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니까요. 하지만그 웃음도 싫지 않았어요. 분명.
“정확히는 ADHD 치료제래.”
“ADHD? 너...”
“내가 ADHD인 건 아니고~ 약 효과 중에 주의력 높여주는 게 있대서.”
“ADHD 질환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부로 먹어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치료제인데 나쁜 게 들어갔겠어?”
“그런가...?”
“마침 엄마도 함 먹어보래서 다음 시험 기간부터 먹어보려고!”
평소에 잘 아프지도 않는 애인데,
“하... 진짜 어쩌지.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아주 잠깐 아프고 말겠지.’
누우면 거의 5분 만에 잠드는 애인데,
“잠이 안 와서 밤을 샜는데, 너무 피곤해...”
‘곧 있을 시험이 많이 긴장되나 보지.’
평소에 화도 잘 안 내는 애인데,
“아 짜증 나!!!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던가!!!”
‘...’
‘쟤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하는 건가?’
친구의 변화를 못 알아차리지는 않았습니다. 못 알아차리는 게 더 이상하겠죠.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하지만 친구의 투덜거림은 날이 갈수록 불평처럼 느껴졌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어주며 맞장구치는 일이 점차 귀찮게 여겨졌어요. 그때 친구의 투덜거림을 잘 들어줬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의 저는 친구의 심정마저 헤아려 볼 재간이 되지 않았어요. 당장 제 앞에 닥친 시험이 더 중요했습니다. 물론 핑계라면 핑계겠죠. 네, 이기적이게도 말이에요.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제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주현!!!”
저는 친구의 이름을, 주현이의 이름을 힘껏 내질렀습니다.
“대체 왜 그래?! 너 지금 시험기간이라 많이 힘들어 보이길래 그냥 넘기려 했어! 그런데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너 진짜 이상하다고!!! ADHD 치료제인가 뭔가 하는 약 먹고 나서부터!!!”
기어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까지, 많은 생각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진심이니까, 주현이라면 제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어보기로 했어요. 하지만 제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주현이는 머리에 무언가를 맞은 것과 같은 멍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눅눅한 여름의 짙은 녹색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여름이었습니다.
그날의 뒷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 지금으로써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날 이후로 주현이를 다시 한번 더 볼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작 그런 약 하나로, 보잘것없는 하얀색 약 하나로 주현이와 멀어졌다는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요.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걸까, 내가 이제 싫어진 걸까... 물론 누군가는 주현이의 잘못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잘못도 명백히 있다고 봐요. 주현이의 변화를 안일하게 여겼던, 주현이의 행동에 관해 화만 내던, 무너진 관계를 개선하고자는 마음을 먹지 않았던 제 잘못도 있는 거죠.
이런, 사족이 길었네요. 여하튼 바라고 있습니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먼 훗날 누군가도 저희와 비슷한 곤경에 처해있다면, 현재에 분노하기보다는 미래에 관한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저보다는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애초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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