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3]형평사를 창립하다
[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3]형평사를 창립하다
  • 임명진
  • 승인 2023.01.1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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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형평사 창립선언문 중

◇서울 최용규씨와 의령사람 장지필

1900년의 백정 집단 청원, 1909년 진주교회 백정동석 예배 등 진주지역의 백정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분출해 왔다.

이는 도축업으로 부를 쌓기 시작한 백정들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더욱 표면화됐다. 그런 진주의 백정들에게 1910년 새해부터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1909년 10월 15일 진주에서 창간한 경남일보는 이듬해 1월부터 백정들에 관한 기사를 연속해서 보도하고 있다.

먼저 5일자 지면을 보면 ‘도수(도축)조합 서울(경성)에 사는 최용규 씨는 본 도내 도수조합소를 설치하려고 어제 여기에 도착하였다’는 간략한 기사를 싣고 있다.

이어 7일자 지면은 ‘그 결과 전해오는 말을 들은 즉 경성 도수조합본부에서 경남지부 영업을 최용규 씨로 위임하여 전달하였다는데 의령에 사는 장지필이라는 사람이 해당 도수영업을 운영한다고 말하면서 각 지역 식육점 주인(포민)에게 돈을 많이 쓴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15일자 지면은 ‘도민(식육, 도살. 백정)이 낭패하여 진주 도민들이 경남 각 군 도민(식육점)들에게 통지하기를 경남도수영업을 승인하였으니 각 군 도민들도 우리들의 인허가 없으면 영업하지 못하니 각 군마다 2~3명씩 본 도로 와서 각기 허가를 얻어 가라 하기에 각 군 도민들 수십 명이 와 도착한 즉 허무한 사실을 꾸며내었으므로(주출) 각 곳곳 도민들이 공연히 각지에 낭비가 과다하다고 원성이 낭자(많다)하다 하더라’고 보도하고 있다.

기사를 분석해 보면 ‘1910년 1월에 서울의 최용규가 도수(도축)조합을 세우려고 진주에 내려와서 의령 사람 장지필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 지부 설립 문제를 의논했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910년 경남일보에 실린 백정들에 관한 기사. 왼쪽부터 1월 5일자, 1월 7일자, 1월 15일자.
◇일제의 간섭에 무위에 그친 도축조합

경남일보가 진주에서의 도축조합 결성 움직임을 소상하게 보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면서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일본 자본가들이 조선의 도축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진주에서도 도축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도축과 정육점 등 전통적인 경제적 기반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백정들은 도축조합을 설립하며 대응에 나선 것이다. 백정들의 도축조합 설립 시도는 그때까지 진주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안들과는 그 결이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백정들은 자신들을 향한 사회적 평등과 차별 철폐에 중점을 두었다면 도축조합 설립 시도는 백정들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진주에서 도축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는 일제의 간섭으로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한데다 농민단체인 ‘농청’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은 도축조합 설립에 나서려는 백정들의 가게를 대상으로 불매운동을 벌였으며 일부는 백정들에게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을 하고 다니도록 강요했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 백정들도 선뜻 조합 결성에 동참하기 어려웠다. 진주에서의 조합 결성이 무산되자 일본 자본가들은 곧바로 3월에 지금의 진주 옥봉에 도축장을 세웠다. 그들의 단체 ‘집성조합’은 훗날 형평사와 대립하며 백정들을 박해하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비록 도축조합 설립은 무산됐지만 완전한 실패로 볼 것은 아니다. 도축조합 설립을 주도한 의령출신인 백정 장지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훗날 형평사 창립에 적극 참여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형평사 본부 사람들
◇3·1 만세운동이 기폭제가 되다

형평사 창립의 결정적인 물꼬가 트인 것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기폭제가 됐다. 당시 진주지역은 3·1만세운동을 겪으면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진주청년회, 진주노동공제회 등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가 활동했으며 개화적인 시각을 가진 활동가들이 많았다. 실제로 형평사는 백정들의 단체이지만 백정 출신이 아닌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의 사회운동가들의 참여가 큰 힘이 됐다.

1900년부터 진주지역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백정 관련 사건들을 경험한 이들 사회운동가들은 백정들을 위한 단체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백정들을 찾아다니며 형평사 참여를 설득했다.

즉 형평운동은 순수 백정의 힘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 지역에서 누적된 여러 힘이 응집해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4월 25일 당시 진주청년회관에서 80여 명의 백정 회원들과 지역의 사회운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형평사 발기 총회가 개최된다.

이들은 강상호 선생을 임시의장으로 추대하고 창립선언문과 규칙을 채택했다. 창립선언문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이라는 모욕적인 칭호 폐지와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눈에 띄는 내용은 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은 “백정들은 자식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쏟아 일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올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때문에 취업에 제약이 많았다”면서 “자연스레 신분으로 인한 차별 금지를 외치는 목소리도 강해졌는데 그 외침이 가장 먼저 진주에서 울러퍼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사원자격을 백정이 아닌 모든 조선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평사의 창립에 사회 활동가들의 참여가 큰 힘이 된 측면도 있지만 이는 후에 백정과 비백정간의 형평사의 운동방향과 조직상의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1928년 제6회 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형평사의 창립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냈으며 또한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형평사의 지도부는 창립 이후 5월 2일과 3일에 진주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열고 형평정신을 널리 알렸다. 13일에는 옛 진주극장 건물에서 창립 축하모임이 마련됐는데, 형평 회원들이 자동차 3대로 시내 일대를 돌며 형평사의 취지와 창립을 축하하는 홍보전단 7000여 장을 배포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당시 도청 소재지인 진주의 인구는 1만 5000여 명 정도에 백정의 수는 500여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형평의 기억]진주의 사회개혁 정신은 남달랐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김중섭 교수
김중섭 명예교수는 “형평사 창립이나 형평운동은 당시 진주의 상황으로 보면 진주에서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사회 개혁 운동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그는 형평사 창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으로 3·1만세운동을 꼽았다. 3·1운동을 주도했던 진주지역의 젊은이들이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으로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가면서 진주지역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사회단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1920년에 설립된 진주소년회를 비롯해 1922년 9월에 우리나라 최초로 진주에서 전국 소작인 집회가 열렸다는 점도 당시 진주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소개했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주노동공제회와 교육단체 등에 이르기까지 형평사 창립 이전까지 수십여 개의 단체가 진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형평사 창립에 필요한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김 명예교수는 “백정 집단청원, 진주교회 동석 예배, 도축조합 설립 시도 등 수십 년 동안 차별 철폐 운동을 벌인 진주 백정들의 경험과 어우러져 여러 사회단체와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했기 때문에 형평사가 창립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저울, 형평사는 직업상 백정들이 항상 쓰는 저울의 특징인 평등을 실제 사회에서 실현하고자 한 단체였다.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을 알리는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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