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예향 인가? 색향 인가?
[경일춘추]예향 인가? 색향 인가?
  • 경남일보
  • 승인 2024.10.0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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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지리산 동쪽땅 진주는 이름난 문향이자 예향이다. 땅이 기름져 물산이 풍부했고 인재가 많아 관직도 석권했다. 진주의 특산품은 ‘정승’ 이라는 일화도 있다. 조선시대 정승은 나랏님만큼이나 높은 직책이었다. 정승은커녕 과거 급제자 한 사람도 없는 고을이 허다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산골이었다. 도로가 없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갈 수가 없었다.

인조반정과 이인좌의 난을 거치며 남명학파는 몰락했고 진주의 사대부들은 관직이 막혔다. 반대파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중앙 진출이 막힌 울분을 그렇게 풀었다.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였던 진주에는 행정관청도 즐비했다. 사대부가의 접빈객 문화는 진주성을 넘나들었다. 진주교방문화는 접빈객이라는 유가(儒家)의 실천 덕목에서 출발한다. 예향(禮鄕) 진주다.

그런데 최근 진주시가 지향하는 진주교방문화 정책에서 자칫 색향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생의 재발견 또는 기생 중심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기생은 천민이었으며 관비와 다를 바가 없는 신분이었다. 논개 외엔 이렇다 할 기생도 없었다.

을사오적 이지용에게 호기 있게 큰소리쳤던 산홍도 끝내 변질됐다. 명월관으로 진출한 산홍은 최기호라는 기둥서방이 있는 유부기였다. 논개의 후예로 공인된 산홍은 이지용에게 저항한 지 2년이 채 못 돼 값비싼 보석을 받고 좋아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산홍에 관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의 낮뜨거운 기사들을 보면, 오랜 세월 산홍을 홍보해온 진주로서는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다.

의암별제도 마찬가지다. 의암별제는 장악원 주부(종6품)를 두 차례나 역임한 진주성 병마절도사 이교준이 신설했다. 그는 1863년 임술봉기의 원흉인 백낙신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동학혁명의 모태가 된 임술봉기 이후 민심은 더 흉흉했다.

애당초 의암별제는 논개라는 충절의 아이콘을 활용한 민심잡기용이었다. 기생들을 내세운 의암별제는 희한한 구경거리였다.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교준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현재 진주성에서 성대하게 치러지는 의암별제 또한 아쉬움을 남긴다. 의암별제의 배경이 된 임술봉기의 진주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현란한 기생들의 모습만 부각될 뿐이다. 진주교방문화는 단순히 기생들이 남긴 가무에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된다. 양반문화와 격조 있는 예절. 그것이 진정한 교방문화이며 예향 진주의 가치를 되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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