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나는 오래 전부터 동네 골목길 걷는 것을 좋아했다. 진주 비봉산 아래 봉알자리 부근 주택가는 나지막한 슬래브 지붕의 단층 양옥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드물게는 이층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을 짧은 편린으로 상상하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각자만의 서사를 간직하고 사는 집들은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정겨웠다. 집과 집으로 이어지고 집과 집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온갖 상상과 상념에 사로잡혔다. 저마다 다른 대문의 색깔과 모양으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나간다. 담을 넘어 고개를 내밀고 피어난 꽃들, 담벼락에 올려진 올망졸망한 작은 화분들, 담 너머로새어 나오는 어른들의 말소리, 웃음 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집안의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들, 골목길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 녹아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골목길 걷기 중 최고는 봄밤의 골목길 걷기이다. 밤이 되면 낮 동안 부유하던 세상의 온갖 풍경과 소란스러운 빛깔이 고요히 가라앉고 봄의 꽃들이 오롯이 제 향기를 내며 봄밤의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골목길을 가득 채우곤 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훅 끼치며 코끝을 간질이던 농밀한 꽃향기에 사로잡혀 골목길을 거닐던 시절이 그립다.
프랑스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과 교수 다비드 르 브르통은 그가 쓴 ‘걷기 예찬’ 에서 걷기는 자기 몸의 감각을 깨우고 단련시키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이라고 했다. 그의 걷기 예찬에 따르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뜻이다. 느리게 걸어야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바야흐로 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꽃망울을 터뜨린 하얀 목련이 등불을 켠 듯 봄밤을 밝히고 서있는 골목길을 걸어보자.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가 걸어온 길,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좁은 골목길에서 내밀한 느낌으로 맞이하던 그 시절과는 사뭇 다르지만 아직도 봄밤의 골목길 걷기는 ‘봄밤’이라고 가만히 발음할 때마다 느껴지는 미몽과 아스라함 사이로 꽃향기와 바람이 뒤섞여 언제나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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