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경 진주교대 교수
낡아가더라도 나에게 잘 어울림을 알고 편한 느낌이 들기에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 롱부츠를 수선할 일이 있었다. 겉은 너무나 멀쩡한데 안감의 가죽이 자꾸 부스러져 나와 그 부분을 교체해야 할 것 같았다. 신발을 샀던 곳에 가서 문의하니 퉁명스럽게 안감 교체는 매장에서 안 된다고 했다. 수선 집에 가서도 안 될 것이라 하며 굳이 해야 하는지를 반문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새 것으로 하나 사지 하는 표정에 더 이상 문의를 하지 않고 나오게 되었다. 너무나 멀쩡하고 겉으로는 새 것 같은데 단지 안이 헐어서 버려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새로 사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것이 마치 인색하기만 한 것으로 치부되는 듯 해서 씁쓸했다.
우리는 낡으면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부모님이 물건을 아끼고 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답답해했었는데 왜 그런 지에 대해 요즘 조금은 이해가 간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멀쩡하고 쓸 만하고 정이 들어 애착이 가는데 굳이 낡았다고 버려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낡음에 대해 자꾸 감추려 하고 상대의 낡음에 대해 때로는 무시하고 경멸한다. 하지만 새 것만이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낡음이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하고 편안함을 느끼게도 하며 잊고 싶지 않은 좋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낡았지만 내 몸과 생각에 맞춤이 되어가는 물건들과의 교감과 그 안에서의 편안함, 좋은 추억에 대한 상기는 그 어떤 고가의 새 물건들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는 없다. 맞춰가며 편안해진 세월과 잊고 싶지 않은 좋은 추억과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삶의 시간이 담겨져 있는 그 낡음에 대해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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