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오늘의 당신(박완호)
[강재남의 포엠산책] 오늘의 당신(박완호)
  • 경남일보
  • 승인 2019.09.1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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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당신
 
/박완호

오래된 당신의 필체를 쏙 빼닮은 바람의 수화를 읽는다 폐쇄된 간이역의 녹슨 출입문처럼 뻐걱거리는 신호대기음 앞에서 자꾸 주춤거리는 글자들, 지금은 아무에게도 전이되지 않을 슬픔의 철자법을 따로 익혀야 할 시간이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키 작은 그림자, 휑한 옆구리 쪽으로 글썽해진 바람이 비껴간다 갈팡질팡하는 나뭇가지에 불규칙적으로 내려앉는 눈발들, 우편함에 쌓이는 주소불명의 편지들, 낯선 곳을 지나고 있을 사람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다


언젠가 무너지기 위해 똑바로 서는 기둥들처럼 나는 또 어디선가 무릎을 감싸고 주저앉기 위해 이 자리를 단단히 버텨야 한다 어딘가에서 첫 햇살에 아려오는 눈을 부비고 있을 오늘의 당신이듯

 


당신에게 기별을 보냅니다. 시간을 견디는 건 가을장마 덕분이라고 중얼거리며 무릎을 감쌉니다. 바람은 잠을 자고 오래된 당신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깊숙한 곳에 묻어둔 기억은 기억되길 거부하나 봅니다. 낯선 곳을 지날 때마다 엽서를 사는 당신이 선명해서 슬픕니다. 주소지 없는 엽서가 우편함에 쌓이겠네요. 당신이 지나온 곳이 폐쇄된 간이역이었다는 걸, 문득 생각난 듯 눈발이 날리는 광경을 보면서 자각합니다. 눈은 무질서로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지만 실상 바람의 결을 타는 순한 태생입니다. 당신의 걸음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당신이 기다리던 글자는 어디로 갔을까요. 실종된 글자를 찾아 제자리에 앉혀주어야겠군요. 당신의 사람은 첫 햇살처럼 당신에게 머물겠지요. 현실을 견디며 삶을 갈망하는 당신을 읽습니다. 주춤거리는 마음은 나뭇가지에 걸어두어도 좋겠습니다. 주저앉기 위해 자리를 버터야 한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던 당신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무너지기 위해 굳건하게 서는 기둥에 대해 말했던가요. 그러하다면 슬픔의 철자법을 익히는 당신과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당신, 순결한 눈물을 흘리는 당신은 또 다른 세계에 있는 당신이겠군요. 햇살에 눈을 부비는 환하게 슬픈 당신 또한 당신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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