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의 발자취, 경남의 얼굴로<3>
남명의 발자취, 경남의 얼굴로<3>
  • 김귀현
  • 승인 2018.01.14 1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에서 숨 쉬는 남명의 자산
<1>실천의 표상, 왜 지금 남명인가
<2>‘칼을 품은 처사’ 남명 일대기
<3>지역에서 숨 쉬는 남명의 자산
<4>남명을 연구하는 사람들
 
덕천서원 전경. /사진제공=한국선비문화연구원


남명의 얼은 우리지역 곳곳에 배어있다. 터와 서원 등은 옛 선비들의 학문과 교류, 서릿발 같은 상소, 역사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 ‘거유’가 남긴 문화재 유적 가운데 그의 생애를 따르는 유산부터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관까지 살펴 본다.


◇후학 길렀던 산해정
김해 신어산 동쪽에 자리 잡은 산해정은 남명이 18년 간 학덕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던 서원이다.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인 이 곳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을 지녔으며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경륜과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것을 표방해 썼다.

남명이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산해정 동편에 서원으로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산해정과 함께 불타 없어져 1608년 중건했으며 다음해 ‘신산서원’의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지금의 산해정은 1815년 다시 세운 것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추녀 끝을 올린 목조기와집이다. 위패를 모시는 사당은 없고 강학 공간만 있는 서원이다.


 
신산서원(新山書院).


◇뇌룡정과 계부당
경남 문화재자료 제129호 뇌룡정은 조선 명종 때 남명이 머무르며 학문을 연구했던 곳이다. 남명은 모친상을 당하고 합천군 삼가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한 후, 1548년부터 김해생활을 청산하고 토골에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살았다. 당시 세웠던 정자는 없어졌으며 지금의 것은 1883년 다시 고쳐지은 것이다.

뇌룡정(雷龍亭)의 ‘뇌룡’은 장자에서 따온 것으로 ‘고요하기가 깊은 연못같다가도 잠겨있는 용이 한 번 소리치면 우뢰와 같이 천지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당시 사림의 총본산으로 후학을 기르는 한편 국정을 비판했다.

남명은 여러 번 벼슬을 사양하고 그때마다 국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조정을 놀라게 하고 전국 유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는 ‘단성소’가 바로 뇌룡정에서 지어 올려졌다. 뇌룡정과 함께 지었던 ‘계부당’은 물 건너(지금의 양천강)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뇌룡정.
산천재.



◇선비가 사랑한 천왕봉 밑 산천재
남명은 “죽은 소의 갈비뼈 같은 두류산을 열 번이나 주파했다(頭流十破死牛脅·두류십파사우협)”고 할 정도로 지리산에 대한 정이 깊었다. 산천재(山天齋)란 이름은 주역 대축괘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이 가장 어려웠던 선조 때의 국사와 국난을 타개한 인물들이 길러진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당해서 일어난 의병장들이 이 곳에서 배출됐다. 건물에는 덕산복거(德山卜居·‘덕산에 터를 잡고’), ‘천석종’ 시가 남아 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처럼 십 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으리


임진왜란때 소실돼 200년 이상 복구되지 못하다가 1817년에 중건됐다. 부속건물로 문집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이 있다. 또 산천재 마루 위 정면과 좌우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남명은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임금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렸다.


 

◇덕천서원
경남 유형문화재 제89호인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처음에는 덕산서원이라 이름해 도산(陶山), 옥산(玉山)과 더불어 삼산의 하나였으며 당시의 규모는 삼산 중 가장 컸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남명의 위패만을 봉안했다가 최수우당이 사절하자 수우당 최선생을 종사했다. 1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실됐으며 광해군 때 사액됐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건물은 1930년대 복원됐다.

덕천서원은 경상우도 유림의 본거지로 봄·가을에 한 번씩 회강이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숭덕사, 경의당, 동무, 시정문, 세심정이 있다.


 

남명 묘소.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남명 묘소
1572년 2월 남명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지 물었다. 선생은 ‘처사(處士)’라 하라고 답했다.

국가문화재 사적 제305호로 지정된 현재 묘소는 산천재 뒷산으로 남명이 생전에 정해뒀던 곳이라고 전한다. 묘 앞에 있는 비문(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은 남명의 벗이었던 대곡 성운이 지었다. 현재 대곡 성운이 지은 원래의 묘비를 포함해 세 개의 비석에는 한국전쟁 때 입은 상흔이 남아 있다.

 


“슬프다. 공(公)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견줄 만한 이가 드물고, 또한 어진 이에 추배(追配)하여 후학들의 종사(宗師)로 삼을 만하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함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리오.”


◇남명기념관
남명기념관은 지난 2001년 남명 조식 탄생 500주년을 계기로 추진돼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매년 10만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기념관 내 제1전시실은 조식 선생이 실천하는 학문으로 전환하는 데 계기가 된 서적들과 경의검, 성성자 등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진열돼 있다. 제2전시실은 남명의 제자를 주제로 제자들의 유물과 미니어처,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제3전시실은 남명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공간으로 문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외부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 선생의 석상,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인 여재실 등이 있다.

김귀현기자 k2@gnnews.co.kr



 

남명기념관. /경남일보DB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