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재 (객원논설위원
밖을 보자. 지천에 널린 꽃과 나무의 향연이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야속하게도 화려함을 시샘한 잦은 봄비가 빨리 지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그 꽃과 신록은 창연한 봄날의 주역으로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얼마 전까지 매화와 벚꽃, 유채꽃이 사람의 눈과 발길을 유혹하더니 벌써 철쭉과 새하얀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린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연보랏빛 라일락이 사람의 서정적 음율을 부드럽게 만들 것이다.그뿐이겠는가. 산에서 들녘에서 눈부실 만큼의 매끄러움을 담고 피어나는 새순과 신록의 싱싱함은 사람의 활력과 기운을 돋우는데 상상 이상의 몫을 한다. 생각없는 식물이지만 모두가 생물로써의 전성기를 맞아 사람에게 주는 선물일 성싶다. 하지만 그리도 곱고 빛나며 아름답고 무성하여도 만고불변의 자연섭리에 한철을 넘기지는 못한다. 사람의 그것과 견주니 서글퍼지고 무상한 마음까지 든다.
장작불과 모닥불
마땅히 사람에게도 전성기가 있다. 20대를 불현듯 켜지는 성냥불에 비유하고 이후를 장작불, 모닥불, 연탄물, 화롯불, 반딧불 등으로 묘사하면서 인생주기를 개념화시키는 우스개도 있다. 30~40대 한창을 활활 타는 장작에 물로써도 쉽게 꺼지지 않는 모닥불과 흡사하다는 묘사다. 잔잔한 웃음에 여러 상상이 간다. 행태와 화력(火力)을 사람의 에너지와 활력으로 대입하니 우습기도 하지만 그럴듯하게도 보인다. 굳이 에릭슨(Erik Erikson)과 피아제(Jean Piaget)와 같은 인간발달 이론가의 학설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스스로 체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를 넘기면 그 장대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마치 가물거리는 연탄불이나 이리저리 헤쳐 봐야 보이는 화롯불, 빛은 발하지만 불이 아닌 반딧불처럼 서서히 존재감을 잃게 된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꽃이 지고 단단하고 옹골진 열매가 떨어지며 넓디넓은 장장한 잎을 잃은 나무의 모습을 연상케 만드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응당 사람과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 시기를 추측해 보자. 일의 관심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와 현격한 차이가 생긴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기회가 주어져도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열정으로 채우던 전성기처럼 뛰지 않는다. 창의적이며 새로운 일과 프로젝트를 엮어 나가고 싶은 욕구가 확연히 떨어진다. 대충 시간을 때우고 자리를 지키는 눈치가 는다. 이른바 복지부동에 보신이 최선의 행동이 된다.
생애주기에 따른 일의 구분
생각하는 뇌가 없는 식물의 일생과 지구상 최고 영장(靈長)인 사람의 그것은 근본이 다르다. 인지능력과 의지에 따라 일정범위를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 인생의 주기와 역정에 따라 직무와 일을 달리해 인생을 엮어 나가면 행복감이 더할 것 같다. 활력과 총기가 충만할 때의 일과 기력은 무뎌졌지만 경륜과 체험이 귀하게 인정되는 직무를 구분하여 삶을 영위하면 어떨까. 뛰고 부딪침이 불가피한 일은 상대적 젊음이 발산되는 전성기에 집중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안정감이 요구되는 과업은 그 이후에 발휘하는 혜안 말이다. 나라에 원로가 존재하고 가정과 직장에 어른이 존경받을 때 전성기의 역동이 더 소중하게 발하는 것이다. 나이 50줄에 접어든 글쓴이는 안타까움과 설렘이 동시에 있다. 전성기를 서서히 넘기고 있다는 기탄없는 자각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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