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2>
오늘의 저편 <22>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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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남 앞에선 무조건 주눅이 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환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가슴을 펴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람들이 몰려와 더러운 문둥이 딸이라고 놀리며 손가락질을 해댈 것만 같았다.

 ‘뭐? 민숙 씨! 너 미쳤니?’ 

 미곡상으로 향하는 형식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민숙에게 어른스레 보이기 위해 있는 돈 다 털어서 여름양복까지 쫙 빼입고 학동에 갔던 그였다. 대가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어린애 취급만 받았다. 세련되게 보이려고 누나 이름 뒤에 ‘씨’ 자까지 붙였다가 머리만 쥐어 박혔다.

 ‘민숙이 누나 정신 차려. 진석이 형은 문둥이 아들이야. 누난 이제  내 꺼야. 누날 위해 꼭 내 것으로 만들고 말 거야.’

 형식은 누나 앞에서 자신 있게 떠들어댔던 말을 되새김질하며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말쑥한 교복차림의 진석이가 마음눈에 걸려드는지 금방 주눅 들은 얼굴로 목을 아래로 꺾었다.

 그랬다. 형식은 진석을 생각하면 제바람에 기가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아서 싫었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더욱더 그 자신이 싫은 건 진석이가 미워죽을 판국인데도 그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 참에 민숙이 년하고 같이 가라.’

 화성댁의 이 말만 생각하면 형식은 온몸의 기운이 절로 났다. 민숙의 남편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행복한 착각에 사로잡혀 가슴이 뻐근하기도 했다.

 ‘누나, 날 남자로 좀 봐 줘. 응?’

 형식은 독백했다.

 오늘도 화성댁은 온종일 딸년 옆에 붙어 앉아 있었다. 

 고추밭에는 잡초가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랐을 것이었다.

 화성댁에겐 지금 밭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볼일이 급해지면 그녀는 딸의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는 다녀왔다.

 며칠 째 낮잠만 자던 바람이 감나무 잎을 살짝 흔들었다. 화성댁은 사립문을 향하여 눈을 크게 떴다.

 ‘다리몽둥이와 팔모가지를 꽁꽁 묶어서라도 형식이와 짝을 지어야 했는데…….’

형식의 그림자라도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화성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어쨌든 그는 며칠 내로 다시 오겠다고 했다. 할머니 건강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속셈은 민숙에게 있을 것이었다. 이번에도 딸년이 말을 듣지 않으면 형식에게 보쌈이라도 하라고 할 작정이었다.

 “우, 우욱, 우욱…….”

 갑자기 민숙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구역질을 해댔다.

 “왜 그러니?”

 난데없는 ‘욱’ 소리에 놀란 화성댁은 말 그대로 눈꺼풀을 위로 찢어발겼다. 

 “우욱욱욱…….”

 민숙은 어머니의 눈앞에다 등을 들이대며 어깨를 더욱 심하게 추썩였다.

 “이년이 설마!”

 화성댁은 민숙의 어깨를 홱 잡아 돌리며 동공을 있는 대로 다 드러냈다.

“아, 아뇨. 체했나 봐요.”

 어머니의 속마음을 바로 읽은 민숙은 목을 세차게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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