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용유담~함허정 25리 선계길 ‘화산십이곡’
[시민기자]용유담~함허정 25리 선계길 ‘화산십이곡’
  • 경남일보
  • 승인 2024.04.2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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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기지개를 켜는 함양 용유교, 아득한 계곡을 내려다보니 신령스러운 기운이 스멀거린다. 용의 비늘처럼 하얗게 솟은 바위 사이로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이에서 우레와 같은 물소리가 천둥처럼 용솟음친다. 산중 용궁을 옮겨 놓은 이곳은 선계로 들어가는 화산십이곡(華山十二曲)의 제1곡 용의 놀이터 용유담(龍遊潭)이다. 화산십이곡은 용유담을 시작으로 수잠탄, 병담, 와룡대, 양화대, 오서, 한남진, 독립정, 사량포, 칠리탄, 우계나루를 거쳐 함허정까지 25여리에 이르는 엄천의 12명소를 조선말 선비인 무산(武山) 강용하(姜龍夏 1840~1908)가 읊은 오언율시를 말한다. 지리산꾼인 이재구 선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오늘은 젊은 아들을 대동하고 별천지를 찾아 나선다.

용유교 하류 잔돌 무더기가 제2곡 수잠탄(水潛灘)이다. 거대한 잠수함 한 척이 출정을 준비하듯 자맥질한다. 엄천은 이곳에서 시동을 건다. 강심에 병풍을 둘러친 듯 기묘한 바위들이 모여 있다. 아들과 아내가 먼저 눈치채고 들어서는 제3곡 병담(屛潭)이다. 휘감는 물소리가 휘파람 같고 포말이 삼킬 듯 아찔하다. “날카로운 바위는 층으로 쌓여 깎아지른 병풍 같고 그사이 물결은 가랑비처럼 뿌옇게 뿜어져 나온다”라고 묘사한 무산의 감탄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한다. 젊은 아들도 신기한 듯 머물기를 종용한다. 수달래가 붉게 피어 선경이다.

한바탕 회를 친 물줄기는 문하마을 앞에 노송 정원을 조성해 놓았다. 제4곡 와룡대(臥龍臺)다. 구한말 고종 광무 10년(1906년) 강신영이라는 사람이 와룡대라 칭하고 계 모임을 한 곳이라고 한다. 일두 정여창과 탁영 김일손도 이곳을 지나며 경치에 반해 “가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하여 가거동(可居洞)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니 범상치 않은 곳이다. 송문교를 지나 물줄기는 북으로 휘어진다. 실려 온 모래와 잔돌들을 허리춤에 쌓아 모래톱을 만들었다. 단애에는 종일 햇살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찰랑거려 무산은 “푸른 절벽 가득 노을이 비치네”라고 읊었으니 이곳이 제5곡 양화대(楊花臺)다. 모래 위로 윤슬이 꽃처럼 내린다. 아내와 아들은 하루쯤 묵고 가자고 채근한다.

물은 다시 동으로 몸을 돌린다. “삼신산은 바다밖에 잠겨 있고 여기 섬 하나 있어 숨어 살만한데”라고 노래한 이곳은 제6곡 오서(鰲嶼), 자라섬이다. 신선을 지킨다는 자라를 인용한 애정이 남다르다. 잔돌 사이 물소리가 남달리 청량하고 유순하다. 한남마을이 수달래 속에서 오침 중이다. 세종의 서자인 한남군 이어가 이곳에 유배와 지냈다는 제7곡 한남진(漢南津)은 그에 대한 유생들의 사랑이 남다르다. 벽화가 예쁜 마을 앞 노거수와 정자들이 시원한 바람을 품은 채 상춘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탁주 한 사발에 김밥 몇 줄이 산해진미 부럽지 않다.

물은 급류를 버리고 부피를 키운다. 운서보는 산정 호수다. 수양버들 봄 치장 중인 숲 사이 비탈에 바위 하나 외롭게 서 있다. 제8곡 독립정(獨立亭)이다. 홀로를 위한 간절함과 기발함이 묻어난다. 보를 넘는 물줄기가 흥분되어 있다. 소를 품은 벼랑 아래 “모래가 따뜻하여 백로가 깊은 꿈에 빠졌고 산색도 맑아 빛난다”라고 강용하가 노래했던 제9곡 사량포(師良浦)다. 그 너머 제10곡 칠리대(七里臺)가 손짓한다. 잠시 쉬며 마실 가고 싶은 칠리탄이다. 후한 광무제의 벗인 엄자릉이 부춘산에 은거할 때 동강에서 낚시하며 선경을 거닐었다는 칠리탄이 이곳에도 살고 있다. 다슬기를 잡는 아내와 아들이 강보에 싸인 듯 평화롭다

곧이어 제11곡 우계나루에 정박한다. 우계는 당나라 유종원이 귀양 갔을 때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 그곳 시냇가를 우계(禹溪)라 한데서 유래한 지명으로 동호마을 앞 나루터다. 화산십이곡은 제12곡 함허정(涵虛亭)에서 닻을 내린다. 자손들이 부친의 위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은 조선시대 누각으로 함양 독바위가 내다보이는 명당이다. 화산십이곡은 선계의 등용문이요 세상으로 나아가는 역이다. 그곳에 봄이 한창 설레고 있다. 우리는 그 기차를 타고 왔다. 눈이 맑아졌다는 젊은 아들의 말속에 답이 있다.

이용호 시민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철쭉이 활짝핀 한남마을 새우섬과 그 너머 신록이 뒤덮인 양화대 앞으로 엄천의 봄이 넘실거리며 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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