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침묵은 괴물을 만든다
[여성칼럼]침묵은 괴물을 만든다
  • 경남일보
  • 승인 2024.03.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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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희 진주여성회 대표
전옥희

 

지난 3월 21일, 경남의 여성단체들은 남해 축협 조합장의 성적괴롭힘을 규탄하고, 농협중앙회의 재발방지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농협중앙회 경남지역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 날 모인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일이 있단 말이가?” 하며 하나같이 분노했다. 남성직원들에게 폭언과 갑질, 업무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일을 시키고, 여성직원들에게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성적괴롭힘이 이어졌다. 오후 4시만 되면 인터폰이 울리고 오늘은 어떤 사람이 불려들어가야 하나 긴장하며, 내가 아니면 안심하면서도 불려들어가는 동료를 보며 마음 아팠던 세월이 수년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여성들은 성적대상화되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오랜 기간 성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해 온 여성운동의 결과, 직장내 성희롱을 인식하고, 피해를 말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2023년 한국여성노동자회의 평등의전화의 상담분석에 따르면 직장내 성희롱 피해에 대한 사내 신고는 49.7%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사내 불리한 처우로 인한 상담이 34.8%를 차지하고 있다. 성희롱으로 인한 도움요청은 늘어났지만 직장내에서 공적인 문제해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93년 서울대 교수가 조교를 상대로 성적괴롭힘을 일삼은 일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을 명명화하고, 예방을 위해 힘써온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피해 구제에 대한 시스템은 쉽게 작동되지 않고 있다. 기관과 조직에서 성희롱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의 성인지감수성은 낮고, 이어지는 2차 피해로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아예 피해자 구제시스템이 없는 곳도 많으며, 조합장, 사장, 법인대표, 군수, 시장처럼 최고권력자에 의한 성적 괴롭힘에 대해 제지하는 시스템은 부족한 실정이다. 기관과 사법부와 노동부는 서로 눈치를 보며 누가 먼저 판결하느냐에 따라 진행하겠다고 폭탄돌리기처럼 미루기 일쑤이다. 사회와 공동체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모르쇠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시시비비를 가려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과 함께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금번 남해 축협의 사건처럼 지역농협이 농협중앙회와 별도의 법인이라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리를 둘 일이 아니다. 성적괴롭힘은 직장에서 제대로 판단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강력히 처벌함으로써 예방과 근절을 이룰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일터에서 늘 긴장하며 불쾌한 말과 성추행을 견뎌냈던 여성노동자들의 피해 사실에 가슴이 아프면서도 용기 내어 맞서나가고 있음에 반갑기도 하다. 침묵은 괴물을 만든다. 피해자들의 용기는 지역의 무소불위 권력자의 횡포를 멈출 수 있었다. 이제 여성들은 침묵하지 않고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괴물을 막아서려 하고 있다. 몇 명만 거치면 다 안다는 좁은 지역에서 피해를 드러내기도 힘들었던 그들은 지금 엄청난 2차 피해를 당하고 있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기실 가부장제가 강한 경남지역에서 여성들의 투쟁은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으며, 성평등한 세상으로 한걸음 더 내딛게 한다.

지금 우리가 피해자를 돕는 길은 피해자를 신뢰하고, 도우려는 메시지를 보내는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폭력은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가해자의 말과 논리, 변명의 목소리가 당연히 크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가해자의 전형적인 방어에 맞서 2차 가해에 함께 하지 않고, 가해자와 분리하고, 피해자와 연대하자. 한 명이라도 더 피해자 편에 서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가해자는 설 곳이 없어진다. 온 몸으로 맞서고 있는 피해자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것을 시작으로 피해자는 안전함을 느끼며 고립되지 않고,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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