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뒤집힌 도립극단 방향성…배우들 ‘날벼락’
한순간에 뒤집힌 도립극단 방향성…배우들 ‘날벼락’
  • 백지영
  • 승인 2024.03.21 20: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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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초 합격 단원 20명 등록 절차 끝내놓고
모든 작품·일정 뒤집는 활성화 계획 道 보고
타 작품 섭외 거절하며 기다린 배우 ‘모멸감’
13명 함께 사과·보상·재발방지 요구 입장문
극단 측 “대부분 새 일정 참여 가능…봉합돼”
“배우들을 일개 부속품 취급하는 일방적인 행보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낍니다.”

올해로 창단 5년 차를 맞는 경남도의 유일한 공립 예술단, 경남도립극단이 논란에 휩싸였다. 올해 첫 공연 연습을 20일 앞두고 갑작스럽게 작품은 물론 연습·공연 일정을 전부 갈아엎겠다고 배우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배우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갑작스런 통보에 ‘멘붕’=경남도는 지난해 11월 28일 경남도립극단 예술단원 공개모집 공고를 내고 2024년 한 해 함께 할 배우들을 모집했다. 당시 공개된 작품은 4월 ‘오장군의 발톱’, 7월 ‘대학살의 신’, 11월 ‘햄릿’ 등 3편의 정기 공연이다. 작품별 공연·연습 일정 등 채용 기간을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다’는 설명을 곁들여 소개한 뒤, 배우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해 응시할 수 있도록 했다.

경남도는 지난해 12월 11일 원서 접수 마감 후 1차·2차 전형을 거쳐, 같은 달 29일 예술단원 15명, 청년단원 5명 등 합격자 20명을 발표했다. 배우들은 올해 1월 5일 단원 등록 절차를 마치고, 연습 시작을 기다렸다.

그런데 2월 26일로 예정된 첫 작품 ‘오장군의 발톱’ 연습을 20일 앞둔 2월 6일 날벼락이 찾아들었다. 도립예술단 창립 5주년을 맞아 새로운 정책을 수립해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최원석 예술감독은 자신 역시 이날 이 같은 지시를 받아, 배우들에게 전화를 돌린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그간 좋은 작품의 오디션을 접하거나 섭외 제안이 들어와도, 도립극단 연습·공연 시기와 겹치는 건 고사해 왔기 때문이다. 연극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현실, 대부분의 배우는 작품이 없는 시기에는 생존을 위해 강의나 임시 직장 혹은 아르바이트 등을 하는데 도립극단 활동을 위해 이를 포기하거나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한 단원은 연습에 대비해 진주 집을 계약했다가 취소하면서 위약금을 물기도 했다.

통보 바로 다음 날부터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항의 방문이 이어졌다. 배우들은 자신 역시 같은 날 이 내용을 알았다는 감독을 향해 “배우 피해가 예상되면서 왜 대응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지만 행정 결정권자가 결재한 사항이라 어쩔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단체 입장문 낸 배우들=언제 새로운 작품을 연습하고 공연할지 확정되기를 마냥 기다리던 배우들은 지난 5일 합격자를 수소문해 16명이 참여하는 단체 대화방을 결성하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감독에게 ‘새 작품에서 꼭 함께하겠다’, ‘피해에 유감을 표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전자 우편을 받았지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극단 측은 지난 18일 배우들에게 새롭게 확정한 제작 계획을 소개하며 배우별 참석 여부 회신을 부탁했다. 4월 22일 연습을 시작하는 첫 작품, 가족음악극 ‘축제’(7월 6~7일 공연)를 비롯해 연습과 공연 기간이 겹치는 2개 작품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빌미’(8월 20~25일 공연)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배우별로 4월·7월·11월 작품 중 1~3개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8월에 작품 2편이 몰리면서 하반기 작품을 모두 출연하기로 했던 배우 3명은 작품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배우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자 극단 측은 지난 20일 진주 경남도립예술단 창작관에서 ‘도립극단 운영 개선 방안 마련에 따른 사업 변경 설명회’를 개최했다. 부단장인 김태열 경남문화예술회관장을 비롯해 예술단 관계자 5명, 배우 6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배우들은 ‘2024 경남도립극단 작품 제작 중단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피해 대책 촉구’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극단 측에 전달했다. 연락이 닿은 배우 16명 중 13명 명의로 작성된 연대 입장문이다.

이들은 입장문을 통해 “작품 제작 중단 사태는 독선적인 행정의 일방적 지시와 그 지시를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여 예술단원이 출연해야 할 작품 일정을 뒤집어 배우들의 작품 출연권과 생계유지를 어렵게 하고 피해를 준 행정 폭거”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작품 제작 중단을 결한 경남도와 예술단 책임자의 사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 다시는 이런 피해가 없도록 제도적인 안전장치 마련 △피해 조사·보상 △차기 작품 참여시 불이익 혹은 2차 피해 예방 등 4대 요구를 제시했다.

◇‘순회공연 확대’ 위해 연간계획 뒤집다=경남도립예술단 부단장을 맡고 있는 김태열 경남문예회관장은 이들에게 이번 결정이 순회공연을 확대하려는 과정에서 위한 차원에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예년처럼 큰 공연장에서만 소화 가능한 중대형 작품을 제작하는 대신, 작은 무대에서도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큰 공연장이 없는 소외 지역에도 다양하게 순회공연을 나서보려 한다는 것이다. 타 기관이라면 외부 용역이나 토론회 등을 거쳤을 법한 방향성 대전환이다

김 관장은 “창단 후 한 번도 사업 평가를 한 적이 없다”며 “그간 도의회와 각 시·군이 요청한 순회공연 확대 등을 반영한 활성화 방안을 마련했는데, 예술단이 이제 5년 차 걸음마 단계다 보니 행정 절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업무상 실수를 했다”고 밝혔다.

예술단은 이 같은 계획을 배우 등록 절차가 완료된 지난 1월 중순 단장(행정부지사)에게 보고했고, 3월 11일 도지사에게 최종 변경안을 승인받았다. 기존 연간 계획은 지난해 11월 수립 후 최종 결정권자 승인을 거쳐 채용 공고, 12월 도립예술단 운영위 심의, 올해 1월 5일 배우 등록은 물론 행정부지사 보고 이후인 1월 26일 도의회 업무 보고까지 거침 없이 추진됐지만 뒤집히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극단 측은 새롭게 마련된 연간 계획에 대한 운영위 심의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조만간 심의에 올릴 예정이다.

◇극단 “잘 봉합”…배우들 “글쎄”=극단 관계자는 “순회공연 횟수를 늘려 배우들이 입은 손해에 대해 보전하기로 했다”며 “20명 중 16명은 변경된 작품에 참여 가능하고, 4명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답을 준 만큼 잘 봉합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타지역에서 활동 중인 한 배우는 “왜 공립예술단이 사람까지 다 뽑아놓고 새 정책을 수립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배우 생활을 하며 작품이나 일정을 바꾸는 경우야 물론 접했지만, 모두 사전에 충분히 이야기하고 배우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일방적인 통보는 배우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면서 “새로운 일정을 맞출 수야 있지만, 극단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이라 함께 하겠다고 답변하기까지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고 털어놨다.

도립극단 공연을 위해 다른 작품들을 고사했던 만큼, 일단 올해 공연은 참여하지만 미리 올해 공연 작품이 지금의 3편인 것을 알았다면 응시하지 않았을 거라는 배우도 있다. 자신이 서고 싶었던 무대는 음악극이 아닌, 지역 민간 극단 등에서는 좀처럼 선보이기 쉽지 않은 ‘햄릿’ 같은 대작이었기 때문이다.

사태를 지켜보는 도내 연극인들 사이에서는 기회비용과 배우들이 입은 금전적·정신적 피해를 순회공연 횟수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출연료로 보전하면 된다는 발상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나온다. 순회공연 확대는 배우들을 위해 극단 측이 새롭게 내놓은 안이 아닌 데다, 이렇게 받는 출연료는 더 많이 예술 노동을 해서 받는 정당한 대가일 뿐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남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 배우는 “도립예술단장인 행정부지사가 와서 이유를 설명하고 사과를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 그래도 위촉직인 부단장(경남문예회관장)과 감독에게라도 사과받았으니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극단 측에 요구한 4가지 사안을 미흡하게나마 약속받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라면서 “후배 배우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명문화된 조례 등을 통해 행정이 예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지난 20일 진주 칠암동 경남도립예술단 창작관에서 최원석 경남도립극단 예술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지난 20일 진주 칠암동 경남도립예술단 창작관에서 ‘도립극단 운영 개선 방안 마련에 따른 사업 변경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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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연 2024-03-22 16:41:56
지난 날 경남도립극단의 좋은 작품들을 접하며 큰 감동을 받고 또 감사했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익숙한 격언이 생각납니다.
공연 규모의 크고 작음, 공연 횟수가 아닌 도립극단 존재의 의미와 본질을 더 신중히 고민해 결정되었으면 어땠을까 싶어 아쉽네요.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한 갈림길에서 내린 결정이라기엔 도립극단의 좋은 공연들을 함께 만들어온 배우들에게 큰 모멸감과 피해를 끼쳤다는 것 자체가 너무 근시안적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사태가 악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바로잡고 개선을 위한 발전적인 안이 없다는 게 경남의 문화공연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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