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십 년 후의 모습 그리기
[경일춘추]십 년 후의 모습 그리기
  • 경남일보
  • 승인 2024.03.0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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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경 갤러리DOO 대표
정두경 갤러리DOO 대표


나에겐 피크닉에 대한 로망이 있다. 아마도 그 로망은 열 살 무렵 처음 읽고 여러 번 읽었던, 1868년에 발표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메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와 이웃집 청년 로리는 함께 숲으로 소풍을 간다. 갓 구워낸 빵과 빛깔 좋은 과일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채 키 큰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숲길을 걸어가는 소녀들에 대한 묘사는 무척 낭만적이어서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 소설이 여섯 자매인 우리 집처럼 딸 많은 자매들의 이야기여서 더 동질감을 느껴 여태껏 내 뇌리에 각인돼 있는지도 모른다.

그 소풍에서 그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앞으로 10년 후 자신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때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는데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소리와 어우러진 그들의 꿈에 대한 열정이 그 책을 읽는 어린 나에게까지 생생히 전해져 왔던 것 같다. 네 자매와 로리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10년 후 그들의 꿈이 이루어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그들의 ‘10년 후의 모습 그리기’! 바로 이것이 내가 그 책 속 피크닉 풍경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진짜 이유였음을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의 8할은 어깨너머로 본 언니들의 문화였다. ‘명화극장’과 ‘주말의 명화’를 통해 초등학생으로는 접할 수 없는 영화들을 일찍부터 보기 시작했고, 언니들의 책장에서 한 권씩 꺼낸 책으로 조숙한 책읽기를 했다. 초등학교 때 중고등학생인 언니들의 음악교과서에 실린 노래들을 죄다 따라 불렀다.

대학생 언니들을 따라 중학생 때 샤무엘베게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내내 고도가 언제 올까를 기다리느라 조바심 내며 무대를 지켜보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형체도 갖지 못한 나의 꿈들이 부유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동안 내 머리 속에,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저장된 수많은 책과 영화와 연극과 노래는 씨앗이 되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조금씩 싹을 틔우고, 가지와 잎으로 자라 작은 꽃들을 피우고 있다.

내가 그려왔던 10년 후의 모습들과 얼추 비슷하게 삶이 흘러가고 있는지 담담하게 돌아보며 나는 오늘도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의 내 모습을 그린다. 그 때도 나는 변함없이 ‘작은 아씨들’의 숲 속 나들이를 배경삼아 그로부터 또 십 년 후의 모습을 그리며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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