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67)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67)
  • 경남일보
  • 승인 2024.02.2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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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남명 선생도 시인이었다, 등불 아래 있었던 사람들(3)
-고 김충열 교수와 조옥환 사장과 그 주변
김충열 교수의 제자 중에는 도올 김용옥 교수가 있다. 그는 추도사에서 「도올 고함(孤喊-빈 배로 온 인생, 그냥 빈 배로 떠나시구려」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큰 별이 떨어졌다. 벽사(碧史) 이우성 선생님 같은 분이 아직도 사계를 지키고 계시지만 한학(漢學)을 머리로 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몸으로 체득하신 석학들이 우리 사회에서 하나 둘 스러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밤하늘의 유성이 꼬리를 흐릴 때 아련히 남는 아쉬움, 아니 그것과는 비견할 수조차 없는 애잔한 감정이 솟구친다. 한 시대의 종언이랄까? 진정한 고전의 상실이랄까?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세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스승에 대한 추도의 마음이 참으로 무겁고 지성에 극하는 존경의 심정 절절한 것이라 할 만하다.

이 지면에서 우리는 고 김충열 교수에게 보내는 지역의 고마움, 남명 정신 현양에 빚지고 있는 지점에서 도올 선생의 ‘고함(孤喊’이 참으로 빛나고 갸륵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도올의 종횡무진한 언술이 언젠가 진주출신 박생광 화백의 그림에까지 닿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동료교수 윤사순(고려대 명예교수)은 「중천, 생애로 본 그의 인물됨」을 썼다. “그는 네 살 무렵에 독선생을 모시고 글자를 익히면서 문장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12살에 그는 사서(四書)를 완독하였다. 그는 그 연배 가운데서 한문을 많이 익힌 분이었는데, 그 실력은 가학(家學)으로 시작한 점에서도 오늘날 흔치 않은 경우에 든다.(중략) 이 무렵 그는 《월간중앙》이 조사한 대학 교수들의 강의 평가에서 우리나라 ‘명강 10인’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여 고대 철학과의 명성에 보탬을 주었다.(중략) 1972년 42세의 장년에 들어선 중천은 정교수로 승진한다. 그가 중국(대만)의 국가박사를 받은 것은 그 2년 뒤이다.” 동료교수의 기록이 남명학 관심자에게는 핀세트로 찍어낸 듯이 뚜렷해 보이는 대목은 정작 다음 구절이다. “그의 남명 연구는 그의 한국유학 연구의 백미에 해당한다. 그는 남명의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한 선비 정신을 밝히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실은 학계에서 다 아는 사실이다.”

그 김충열 교수는 남명 연구 40년, 지리산 아래 덕산, 산천재, 덕천서원, 남명 12대 후손 조옥환 사장을 만나면서 그 40년의 위업이 두류산을 울리고 지역을 울리고 전국의 잠든 실천정신에 불을 붙였다.

필자는 매우 성급하여 그 매듭의 마지막을 칠언율시로 남긴 중천의 심회를 먼저 옮겨 놓는다.

“40년 동안의 기나긴 꿈을 깨고 나니/ 지난 일 구름되어 끊겼다 이어졌다 하네/ 시작은 고통스러웠지만 끝은 아름다우니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어진 이를 선양하고 오는 이를 잡아 주었으니 스스로 흐뭇하여라/ 내 평생 그래도 행복했던 것은 좋은 동반을 만났음이니/ 죽은 뒤 알아주는 이가 나오면 능연각에 이름을 써 주겠지/ 공을 이루고 물러가는 길 외롭고 쓸쓸하기에 마지막으로 천왕봉을 되돌아보니 채색노을이 고와라!”

그가 죽은 뒤 능연각(개국공신 24인의 초상을 걸어둔 집)에 이름을 적어 주겠지 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아프고 아름답다. ‘좋은 동반’(조사장)에게 주는 시다. 그는 끝까지 우정과 동업과 인연에 충실했다.

중천 김충열 교수가 덕산에 처음 방문하는 감격을 기록한 대목을 되짚어 보자. 이 기록은 오로지 김교수가 말하는 좋은 동반자 이야기, 동업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그 시작이 지리산 중턱에서 발원하는 덕천강 원류요 그 옹달샘격이므로 그것이 찰찰 흐르는 계곡으로 이어지는 릴레이와 같은 흐름일 것이다. 김교수는 고려대학교의 《한국사상사》강의의 경우 남명 조식에 관한 부분은 특별히 역점을 두었다. 한 학기 강의가 끝날 무렵 철학과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와 자신이 남명 선생의 직손이라고 했다. 그 학생 이름이 조을환이었다. 반가왔다. 사실 그때까지 김교수는 남명의 자손들은 얼마 되지 않거나 한미해져서 조상을 현양하지 못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자손이 약 5백호나 될 정도로 많다고 했다. 그리고 덕천서원에서 발간한 근간인 『남명선생문집』 한 질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 그 학생에게 궁금했던 것을 들었고 특히 필자가 산수를 좋아해서 남명선생이 만년에 거주했던 덕산의 산수풍광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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