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얼마 전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 때면 으레 앞날을 축복하는 덕담들을 주고받는다. 지난주에는 명절치레까지 겹쳐 갑절의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갑진년이 왔으니 어느 해보다 더 값진 한 해를 맞으라’는 말을 제일 많이 건넸던 것 같다.
그러나 졸업식장을 나서며 학생들을 배웅하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뭔가 공허했고, 걱정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컸다. 막연히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마주한 현실이 너무 뻔하고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필자는 지금 우리 사회가 먹고사는 문제를 빌미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서민의 노동력과 자유를 착취하는 사회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70년대 독일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제목처럼 불안이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실존철학에서 불안은 ‘인간 존재가 실존의 유한성을 감지할 때 느끼는 근본적인 감정’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런 실존적 불안에 앞서 우리 졸업생들이 느끼는 불안은 우리 사회가 가진 ‘예측불가능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과도하게 노출되는 불협화음이 개개인의 현실적 지위에 대한 불안을 들쑤시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과 불안, 가난과 공포에 관한 한 기형도(1960.3.13.~1989.3.7.)만큼 탁월한 작품을 많이 남긴 시인이 없을 듯하다.
가난과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기형도 시인처럼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10세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계가 어려워지면서 온 가족이 ‘입에 풀칠한다’는 말의 생생한 현실을 자각하며 살아야 했다. 인용시에서처럼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날’ 그는 누이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두 살 터울 누이가 갑자기 사망한 중학 2년 때부터였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안개’가 안양천변을 오가던 직공들의 암담한 삶을 그린 작품인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1960~1980년대는 개인의 삶과 사회적 환경이 극도로 예측불가능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등단 후 5년,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한 뼘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기형도의 시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1980년대를 흑백사진으로 만들어버린 조사(弔辭)’로 더 널리 읽히지만, 대부분 가난과 불안, 시대의 공포에 관한 것들이었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중략)/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대학시절’ 부분)라는 내용에서 당시 대학 캠퍼스의 살벌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캠퍼스에 총성은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총성 못지않게 엄중한 현실이 있어 어떤 졸업생도 속없이 환하게 웃지 못하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안을 해소할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한 이유다.
기형도가 종로의 심야 파고다극장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지났다. 죽기 직전 해에 그가 남긴 푸른 노트의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 한 구절을 빌려 전하고 싶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35년 전 그의 노래가 2024년을 변화시켜 갑진년이 정말 값진 해로 기억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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