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현장 13]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을 찾아서
[경남의 고문헌 현장 13]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을 찾아서
  • 경남일보
  • 승인 2024.02.13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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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인은 언제부터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을까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다는 것은 인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기록을 통해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고, 그것을 축적하여 후세에 전해줌으로 인해 오늘날 인류 문명 발달에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언제 어떤 기록을 남겼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곧 문명 세계로 발전해 가는 기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경남에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득한 고대에는 문자나 기록의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이 있어도 이를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었다.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도구가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이나 경험을 서서히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 기록은 대부분 고인돌(지석묘)에 남아 있다.

경남 곳곳에는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 많은 고인돌 중에서도 함안 가야읍 도항리와 동촌리,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고인돌에 새겨진 바위그림이 널리 알려져 있다. 경남지역 기록의 시작점을 찾아보기 위해 경남의 대표적인 고인돌 바위그림을 찾아 나섰다.



◇도항리 35호 고분 출토 바위그림

도항리 고인돌 바위그림을 확인하기 위해 아침 일찍 함안 말이산 고분으로 향했다.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대형 고분만 37개에 달한다. 말이산의 ‘마리’는 ‘우두머리’라는 의미이고, ‘말이산’은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을 의미한다.

함안 읍에서 무진정 가는 길을 따라가다 함안공설추모공원 안내판을 따라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고분군 사이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였다. 주위에는 온통 고분이다. 여러 고분 중에서 가장 큰 말이산 34호 고분을 찾았다. 바위그림이 새겨진 지석묘는 고분 중턱에 노출되어 있었고, 금속으로 만든 표지 막대가 서 있었다.

도항리 바위그림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오후에 방문하였을 때는 햇볕이 서쪽에서 바위 정면을 비추어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잘 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선 것이다. 아침 일찍 방문하니 햇빛이 비스듬히 바위를 비추어 그림이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7개의 동심원과 290여 개의 크고 작은 바위 구멍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이 바위는 가야읍 도항리 말이산 34호 고분에서 1991년에 발굴된 것이다. 널의 덮개석으로 덮여 있었던 것을 발굴하여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이 구멍이 해와 별을 새긴 것이 맞다면 무덤의 주인은 바위에 새겨진 해와 별을 바라보면서 잠들어 있는 것이다. 무덤을 만들면서 죽은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이기도 하다. 가야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인데도 아무런 보호각도 없이 노출되어 마멸의 위험이 있었다. 보호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고분군 주변을 둘러보니 개인의 비석, 무덤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근래까지만 해도 고분은 주인 없는 무덤 또는 언덕 정도로 인식한 듯하다.

말이산 남쪽 끝자락에 있는 가장 높은 고분을 올랐다. 언덕에는 우람한 정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은 언덕이 아니라 말이산 37호 고분이었다. 말이산고분은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도굴이 되었는데, 37호 고분은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분 위에 버티고 선 정자나무 때문에 발굴이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고분에는 또 무슨 기록이 묻혀 있을지 궁금하다.

 
도항리 도동 제3호 고인돌
도항리 도동 제3호 고인돌에 새겨진 그림




◇군북 동촌리 26호 고인돌 바위그림

함안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군북면의 동촌리 일대다. 이 일대에는 27기의 지석이 존재하는데, 이 중 그림이 새겨진 고인돌은 26호다. 26호 고인돌을 찾아 나섰다. 동촌리는 함안 군북역 인근이었다. 동촌리 지석은 함안군 군북면에서 여항산 쪽으로 가는 도로변 논 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석에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서촌리에서 군북역 방면으로 순서대로 ‘군북지석묘○호’로 번호를 붙여 두었다. 서촌리에서 군북역 쪽으로 길을 걸으면서 길가 지석묘 번호 찾기를 해도 재미가 있을 듯했다. 그런데 지석묘는 16호에서 끝이 난다. 필자가 찾고자 하는 것은 지석은 26호인데, 찾을 수가 없었다.

군북역으로 돌아와 인근에 있는 효성그룹 조홍제 생가를 구경하면서 26호 지석묘를 찾았다. 그런데 어느 개인 주택 대문 옆에 문화재 안내해설서가 서 있다. 26호 지석묘는 조홍제 생가 뒤편 신창경로당 인근 개인 주택 마당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지석묘는 복제하여 함안박물관 뜰에도 전시하고 있었다. 26호 지석묘에는 398개의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들은 서로 연결해 보면 마치 별자리를 나타낸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함안 군북 도항리 14호∼16호 고인돌


◇하동 옥종 구암대 바위그림

근래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에서도 바위그림이 대량으로 발견됐다는 언론 보도가 있어 찾아갔다. 찾아가는 길은 진주에서 추동마을을 거쳐 옥종으로 가다가 한골마을 표지석을 따라 좌회전하여 가는골로 들어서면 된다. 내비게이션에 법대리 한계교를 입력하여 찾아가게 하는 것이 편하다.

한계교 입구에는 우람한 소나무 1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소나무 숲속에 특이하게 생긴 너럭바위 하나고 놓여 있고, 바위 모서리에는 ‘구암대(龜巖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를 새긴 인물은 알 수가 없었다. 구암대 주변에는 광산김씨 문중 무덤 4~5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무덤을 모두 이장해 가고 상석만 모퉁이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이것만으로는 ‘구암대’의 유래를 알기는 어려웠다. 바위 위에 올라가니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 면에서는 곰보 얼굴 자국처럼 크고 작은 구멍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었다. 구암대 옆 작은 바위에서 크고 작은 구멍에 새겨져 있었다.

하동문화원은 당시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에 현장 확인 조사를 의뢰해 합동 조사를 벌인 결과 ‘구암대’ 바위 면에 성혈 600여 개, 연접해 있는 동쪽 바위 면에 50여 개가 확인돼 우리나라 최대 규모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현장으로부터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약 600∼700m 지점 사이의 대형 바위 면에서도 다수의 성혈과 함께 윷 판형 암각화 2개가 확인됐다. 대곡리 성혈은 국내 최대 규모의 성혈 유적으로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오랜 기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학술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파악이 된다. 그 외 함안 도항리, 밀양 살내, 밀양 신안, 의령 마쌍리, 사천 본촌리, 남해 양아리 등에 암각화가 발견됐다. 이 외에도 경상국립대 박물관에 1995년에 발굴한 경남 사천시 곤명면 본촌리 유적 출토된 동검 암각화, 경남 의령 마쌍리 유적 출토 암각화 등이 있는데, 경상국립대와 김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동 옥종 구암대 고인돌
대곡리 성혈

 

◇의의

경남지역 고인돌은 기원전 4~5세기경의 것이라고 한다. 경남지역에 산재한 바위그림을 살펴보면 큰 동심원이거나 크고 작은 구멍이 빼곡히 바위 면에 파여 있었다. 동심원은 해나 달을 나타내고, 작은 구멍은 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농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해와 달이었다. 해와 달은 그들이 가장 숭상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가장 숭상하는 해와 달, 그리고 방향을 알 수 있는 별을 새겨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문자나 기록의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자기의 생각과 염원을 지석묘에 구멍을 파서 기록을 남겨 둔 것이다.

고인돌에 새겨진 동심원과 바위 구멍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적 의식에서 새긴 것, 별자리는 선사시대 우주관을 나타낸 것, 기우제와 관련해서 제작된 것이라는 해석이 다양하다. 청동기시대 경남인이 남긴 바위그림은 이처럼 지극히 단순 반복적인 그림이었다.

구멍을 만든 이유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으나 풍년을 빌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알 구멍은 주로 다산기원과 풍요를 위한 신앙 대상의 한 표현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또한 알 구멍을 서로 연결하면 하늘의 별자리와 같은 형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암각화에 새겨진 각종 문양은 당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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