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촌 다녀오겠습니다 (2)의령예술촌
예술촌 다녀오겠습니다 (2)의령예술촌
  • 백지영
  • 승인 2024.02.04 1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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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지역사 뛰어넘어 예술향을 그린다오
진주에서 33번 국도를 타고 시원하게 북쪽으로 달리다 합천 쌍백면에서 한태령 고개를 넘어가면 의령 궁류면에 가닿는다. 봉황대나 벽계야영장 등을 찾는 타지역 주민들의 발걸음이 꾸준한 지역이다.

그 가운데 커다란 수박과 멜론을 형상화한 체험동이 인상적인 곳 ㈔의령예술촌이 있다. 누구도 오지 않을 법한 오지가 아닌, 군 지역에서는 비교적 외지 관광객들이 자주 찾을 법한 입지에 ‘좋은 장소에 잘 들어섰네’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찬란하기보다는 암울한 지역사가 있다.

 
의령예술촌 회원들.
의령예술촌 회원들.

 

◇총기 난사 아픔을 딛고=“차마 아무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지역의 아픔을 문화 예술로 치유하고 싶었습니다.”

60대 이상이라면 적지 않은 이들이 기억할 법한 우순경 총기 난사 사건, 그 끔찍한 상흔은 십수 년이 지나도록 지역에 끈덕지게 소리 없는 두려움을 남겼다.

의령 궁류면에서 1982년 4월 26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무차별 살인 사건은 비공식 집계로 80명에 가까운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윤재환(문학) 의령예술촌장 역시 그 사건으로 중학교 동기 3명을 잃었다.

“그 사건 이후 의령으론 사람들이 시집도, 장가도 오지 않으려 했어요. 세월이 지나도 불행한 기운이 흘렀어요. 공권력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보니 다들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무서워했지요. 저 역시 관련 시를 한참 전 써놓고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문화 예술의 향기로 ‘총소리 나는 동네’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었다.

1990년대 말 농촌 공동화로 전국 곳곳의 시골 학교가 하나 둘 통폐합하고 폐교가 늘어나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밀양, 김해, 통영 등에서 폐교를 예술촌으로 꾸리는 시도가 잇따랐고 경남도 역시 각 시·군마다 폐교를 활용한 예술촌을 1곳씩 조성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윤 촌장을 비롯해 의령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이 시범 삼아 1998년 폐교된 평촌초등학교 건물에서 전시에 나섰는데,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시는 서울 고급 미술관에 가서만 볼 수 있는 거라고 여겼던 인근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에서 열리는 전시는 문화 예술을 향한 갈증을 해소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인근 농공단지 노동자들이 퇴근 후 줄지어 찾아오면서 오후 9시, 10시까지 연장 전시에 나섰다.

윤 촌장은 “인기에 힘입어 뜻있는 이들끼리 평촌초 건물에 예술촌을 조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며 “누구도 우순경 사건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을 거다. 지금은 이렇게 총기 사건이 아닌,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윤재환 촌장.
윤재환 촌장.

 

◇정겨웠던 폐교 건물과 작별=의령예술촌은 1999년 5월 21일 의령문화원과 손잡고 옛 평촌초 건물에서 문을 연다. 건물 1층과 2층을 통틀어 8개의 교실을 전시장, 작업실, 사무실, 쉼터 등으로 꾸몄다. 건물 외부도 1970년대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정겹게 꾸몄다. 원두막과 장승 등 토속적인 향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았다. 관광버스가 몇 대씩 줄지어 방문하기도 했던 황금기였다.


한때 전기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윤 촌장이 개인 대출을 받아 가며 예술촌을 유지했을 정도로 궁핍한 시절도 있었지만, 이들의 노력을 눈여겨본 의령군이 2004년부터 지원에 나서면서 숨통이 트였다.

2012년에는 지금의 새 건물로 이사도 왔다. 이전 폐교 건물은 교육청 재산이었던 만큼 임대 건물을 매입하는 것도, 새로운 건물을 지어 확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만큼 의령군 지원 아래 새 둥지를 틀었다.

예술촌 내 개인 작업실은 두지 않고 공동 작업실만 두고 있는 구조인 까닭에, 기존 폐교 건물은 작가들의 개인 작업실로 활용했다. 앞서 멋들어지게 꾸며놨던 공간에 대한 애착이 컸던 만큼, 작가들이 잔디도 깎고 페인트도 칠하며 5년가량 폐교를 관리해왔는데 어느 순간 임대를 거절당하면서 인근 마을에 새롭게 작업실을 구해 이용하고 있다.

최영근(서양화) 전 부촌장은 “건물 안전 문제로 우리를 내보낸 뒤 수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다시 빌리고 싶다고 수없이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거절당했다”며 “정성껏 꾸민 공간이 방치돼 길고양이가 들끓고 흉물이 된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공예 작품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공예 작품들.

 

◇인근 주민도 함께=새 공간에 둥지를 튼 예술촌에는 몇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토속적인 정취를 즐기려던 방문객은 줄어든 반면, 예술촌 회원들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30~40명 정도 규모에서 130명대로 늘면서 기존에는 없던 공연 분과도 새롭게 생기고 그림 분과는 서양화·한국화·서각 등 세부 장르로 분할됐다. 현재 국악·정가·문학·서양화·한국화·서각·공예·양악·다도·사진 분과 등 10개 예술 분과가 활동하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은 봉사 분과다. 대부분이 인근 마을 주민들로 채워져 있다.

토속적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예술촌 외부 풍경.
토속적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예술촌 외부 풍경.

 

개촌 당시부터 마을 주민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는 등 주민 친화 행보에 나서왔던 예술촌에 각별한 정을 느끼는 이들이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뭐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 청소든 집기 보수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다.

예술촌은 2월 휴식기를 가진 후 3월부터 본격적인 행보에 나설 방침이다. 다양한 전시와 함께 매월 1·3째주 토요일 오후 3시 개최하는 ‘토요 음악회’ 등이 준비돼 있다. 지역 내에서는 비교적 관광객들의 방문이 잦은 지역인 만큼, 인근을 지나던 지역 가수가 음악 소리에 홀려 방문해 한 곡 연주하고 가거나 야영족이 한 곡조 뽑고 가기도 하는 등 늘 흥겨움으로 가득한 자리다.

폐교 활용 붐이 일었던 과거, 함께 피어났던 예술촌 상당수가 문을 닫은 현실 속, 의령예술촌은 꿋꿋이 자리를 지킨 비결을 ‘스스로 키워냈기 때문’이라고 자부한다.

“풍족한 지원을 받거나 유명한 작가들만 들어갔던 예술촌들은 다 문을 닫았지만, 이름 없는 작가들이 들어와 스스로 키워낸 우리는 살아남았죠. 사실 언제든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끼리 회비와 후원금을 모으고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었던 만큼 아까워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로 개촌 25주년을 맞은 예술촌은 11대 기획을 수립하고 분주하게 달려 나갈 예정이다. 전시 5종과 음악·공연 2종, 경연·대회 3종, 의령예술제 등이 준비돼 있다.

윤 촌장은 “늘 계획을 완수해 왔던 만큼 올해도 자신있다”며 “늘 예술촌을 ‘주민과 관람객과 작가가 함께 만나는’이라고 수식하는 것처럼, 작가들보다 주민을 앞에 두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들여 보려 한다”고 밝혔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예술촌 내 작품 판매 공간.
예술촌 내 작품 판매 공간.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서양화 작품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서양화 작품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서각 작품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서각 작품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사진 작품들.
예술촌 전시실에 설치된 사진 작품들.
의령예술촌 회원들.
의령예술촌 회원들.
예술촌의 상징인 수박과 메론을 형상화한 체험동.
예술촌의 상징인 수박과 메론을 형상화한 체험동.
전시실 입구.
전시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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