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10) 통영에 눈이 오면(최은묵)
강재남의 포엠산책(110) 통영에 눈이 오면(최은묵)
  • 경남일보
  • 승인 2024.01.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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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불러야지
강구안 광장에서 손잡고 춤을 출까


우리의 노동은 꽃이 아니어도 넉넉했다고
흐린 목소리 같은 조명이 켜져도

통영엔 같이 늙어도 좋을
다락방이 있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눈은 어떤 맛일까?

빙수를 먹으러 가야지
로피아노 3층에서
남겨둔 그림자의 춤을 내려보며

눈이 내리는 날까지만 우리
통영에 함께 살자고

겨울을 접었다 폈다 딴짓하듯
누구라도 먼저 말해주면 좋겠는데

충규도 불러야지
희준도 불러야지

다락방 가득 노래를 채우게
눈 담을 커다란 가방 하나씩 들고 오라고

사람들을 불러야지

못다 한 이야기는 눈 그치면 하자고
서로 눈만 바라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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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온화한 기후로 좀체 눈이 내리지 않은 곳이에요. 그러던 것이 지난 크리스마스에 펑펑 눈이 왔어요.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수년 만에 내리는 눈이라 낭만을 즐기기에 충분했어요. 강구안 문화마당을 돌아 백석거리를 걸었고요. 로피아노에 들러 차를 마시며 출렁이는 바다를 보았어요. 한때 영화로웠던 우리의 청춘이 거기 있더군요. 열정 넘치게 논했던 예술도 뺨이 달아오른 채 그 자리에 있었고요. 듕섭다락방에는 크고 단단한 이상을 말하던 시인 충규와 희준도 나란하게 있었어요. 그곳 시간은 천천히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의 시간만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어요. 젊은 충규와 어린 희준 시인, 그들이 그들의 별로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참으로 눈부신 날을 보냈어요. 그때는 몰랐어요. 환하고 맑은 날들이 우리 가슴에 이리도 저리게 남을 줄을요. 지난 것들은 늘 아름답게 남아서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나 봅니다.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에 이럴 거면 차라리 눈이나 올 것이지, 하는 말을 들은 은묵 시인이 부적이라며 보내준 시 ‘통영에 눈이 오면’. 그러고 이틀 후에 거짓말처럼 통영에 눈이 왔습니다. 평소에도 영이 맑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말한 은묵 시인에게 그래, 친구야, 그대 말이 언제나 다 맞네. 그러면서 내내 안녕하라는 안부를 놓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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