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권 ㈔대한소힘겨루기협회 회장
소 힘겨루기는 그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농경과 목축의 시작된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초동들이 심심풀이로 각자의 소를 데리고 나와 너른 벌판에서 싸움을 붙이며 놀았던 데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군중 앞에서 펼쳐진 인위적 소 힘겨루기는 조선 후기부터 놀이로 성행했다고 짐작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소 힘겨루기는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을을 대표하는 소를 끌고 나와 연례적으로 벌인 소 힘겨루기는 경남 일원과 경북 청도 지역 등 주로 남강과 낙동강이 인접한 가야문화권에서 전승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진주 군수였던 야마시타 마사미치(山下正道)가 ‘조선의 명물, 진주 투우’라는 제목으로 경성일보에 쓴 글에는 진주 소 힘겨루기가 188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인 경남일보 주필로 활약한 장지연의 글을 통해, 1909년 이전부터 진주에서는 대규모 소 힘겨루기가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5년에 발간된 ‘조선’이란 잡지에는 “진주의 투우는 진주 명물의 하나로서, 진주라 하면 바로 투우가 연상될 만치 유명하야, 남선(南鮮) 일대에서는 누구나 알지 못하는 자가 없는 것”이라고 할 만큼, 진주는 소 힘겨루기의 발상지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보면, 소 힘겨루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층민중과 함께 해온 놀이문화였고, 저항정신이자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명 선생의 경의사상을 그 원형으로 하는 진주정신은 시대적 국면마다 살아서 꿈틀거리며 면면히 이어져 왔다. 소 힘겨루기와 형평운동의 발상지가 진주라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소에 대한 인간의 예의랄까 경외심은 예사롭지 않다. 백정에게 소는 원래 신성한 동물이고, 소를 잡기 전에 도수장 안에 정화수를 뿌리고 소의 명복을 비는 염불을 외며 제(祭)를 지냈다. 소를 잡는 행위도 소의 혼백을 상계로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때 사용한 칼도 신물(神物)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소 힘겨루기에서도 소는 인간적 삶의 동반자와 대리인이라는 개념이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다. 소 힘겨루기는 인간이 힘겨루기의 과정에 거의 개입할 수 없는 점에서 다른 민속놀이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소 힘겨루기 대회가 끝나면 힘겨루기 소의 은퇴식을 열어주고, 소가 죽으면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봉분을 만들어 비석까지 세워준다. 일부 외국인에게 우리의 소 힘겨루기는 스페인의 투우에서처럼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황소와 투우사를 보며 환호하는 관객이 없는 것, 그리고 잔혹함을 보지 않아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하고, ‘죽음의 투쟁이 아니라 씨름에 가까운’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놀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소 힘겨루기와 형평운동은 기본적으로 소에 대한 경외심과 생명 존중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소 힘겨루기는 관람스포츠적 성격의 소 힘겨루기 대회와 추석맞이 행사, 주민과 관광객을 위한 상설 소 힘겨루기 등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면서 전통적 무형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경남지역 주민들에게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적 특징을 담고 있는 놀이로 인식되고 있고, 한국문화의 전통을 표상하는 놀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 힘겨루기는 전승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치를 지닌 소 힘겨루기가 세대를 이어가는 지속 가능한 전승이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소에 대한 경외심과 생명 존중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민초들과 함께 시대정신을 대변해 온 소 힘겨루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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