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맥고풍변 우리의 역사가 되다
[기고]정맥고풍변 우리의 역사가 되다
  • 경남일보
  • 승인 2023.11.0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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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하늘 높고 햇살 밝은 날 10월 26일 해인사 길목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내암(來庵) 정인홍 기념관에서 참으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내암의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후손들과 축하하는 사람들 200여 명으로 행사장이 꽉 찼다. 이 행사는 서산정씨 대종회가 주최하고, 내암의 직계 후손들이 주관하고, 남명선생 선양회가 후원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뜻깊은 행사라면 그곳 자치단체장이 중심에 서고 유림이 함께 주관해 치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누군가에 의해 모함받고 패대기쳐졌던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가 세상 속에 드러나는 날 안타깝게도 두 기관·단체는 한 걸음 뒤에 있었다. 또 알고 보니 남명 종중도 개별적 참여였다. 아직도 이 일에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정맥고풍변'이라는 말이 어렵게 여겨질 것이므로 이 말부터 살펴드린다. 이 말은 내암 정인홍이 1606년 가을 가야면 각사리 부음정(孚飮亭)에서 쓴 글의 제목이다. 대강의 뜻은 “정맥과 고풍을 분별해 논한다”이다. 내암이 이 글을 쓴 이유는 남명과 퇴계의 문하를 출입하던 정구(鄭逑)가 친구 동강 김우옹이 죽었을 때 만장(挽章)에 쓴 '퇴계는 유학의 정맥이요(退溪正脈) 산해(남명 조식)는 고고할 뿐이다(山海高風)'라는 글 때문이다. 내암이 보기에 정구가 스승 남명의 학문을 정통도 아니면서 고상한 체한다는 퇴계의 표현을 끌어다 스승을 비하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퇴계는 제자 황준량과 주고받은 편지에 “(남명의) 유학 공부가 얕다, 이단인 노자와 장자 공부다, 고고한 척한다”라고 수차 뒷담화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구가 퇴계를 높이면서 남명을 비하했으니, 내암은 통렬하게 논박하는 글을 썼다. 당시 글을 썼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필사본이 수백 년간 진양하씨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 종택의 전적(典籍) 속에 있던 걸 경상국립대 이상필교수가 2003년에 발견해서 햇빛을 보았다.

그러면 뭘 정맥이라 하는가? 유학의 도통(道統)을 가리킨다. 중국 유학자들이 공자를 “만세의 사표”로 만들려고 덧대고 가공하는 가운데, 맹자는 전설 속 가공의 인물 요·순·우를 실존 인물로 둔갑시켰고, 이들의 가르침이 주(周)나라 문왕·무왕·주공·공자로 이어졌다고 썼다. 그런 성왕(聖王)의 학문(道學)이 맹자까지 왔고, 그 후 1천 년 넘게 끊겼다가 정자(程子)와 주자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학자들에 따르면, 우임금은 춘추시대 중엽에 난데없이 등장했고, 요·순은 주나라 초기 어떤 문헌에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설화의 역사화'요 '설화로 경전 만들기'를 시도한 결과가 도통설(道統說)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공된 논설도 모르고 조선의 퇴계를 정맥이라 쓰다니! 오늘의 우리가 생각하면 퇴계는 주자학이라는 우물 속에서 하늘을 본 유자에 불과하다. 주자학 절대주의로써 그는 조선의 학술 헤게모니를 잡고 즐겼을 뿐이다. 조선의 유학이 일본보다 뒤처지게 만든 장본인이 퇴계다. 그런 퇴계를 정구는 유학의 정맥이라 높이고, 남명의 학술은 얕고 고상한 체했다고 써서 낮추었다. 그래서 내암은 정확하게 정맥의 의미를 쓴 다음, 퇴계는 결코 정맥이 될 수 없다고 명쾌하게 논변해 일깨웠다.

그러나 어쩌랴! 권력이 곧 진리요 정의가 아닌 것은 동서와 고금이 없다. 그 시대 반쪽 학문, 주자학만 가지고 조선이라는 공동체를 농단하던 퇴계류가 대세였던 때에 두 학파가 인조정변(1623)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것은 난세였다는 뜻이고, 우리 민족의 불행이었다. 연구된 결과를 보면, 그들은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반정 : 틀린 걸 바로 잡음'을 끌어다 말 치장을 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아비의 나라라고 공공연히 말하며 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은혜를 광해군이 배반했다는 죄목과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군을 죽였다는 폐모살제의 죄목을 만들어 광해군을 폐하고 내암 정인홍을 역적으로 몰아 재판 절차도 없이 죽였다. 그래 놓고 인목왕후가 광해 죽으라고 궁중에서 푸닥거리 한 일 등은 게 눈 감추듯 감추고 덮었다. 또 퇴계의 남명 뒷담화는 모른 체 하고 내암의 바른말 회퇴변척소를 꼬투리 잡아 모질게, 길게 앙갚음하는 철면피였다. 그렇게 역적으로 몬 내암과 남명을 그들은 한 묶음으로 패대기쳐서 역사의 금기어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조작해 광해군을 오랑캐를 편든 왕으로 기록한 사실(史實)은 '선조수정실록 태백산 본'으로 드러났고, 내암이 정구의 어쭙잖은 주장을 바로잡아 일깨운 글 '정맥고풍변'도 돌에 깊이 새겨져 만천하에 공표됐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시간의 힘과 정의'를 보게 된다. '역사는 기억된 과거'라는 루카치의 말대로 내암은 이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됐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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