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45)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45)
  • 경남일보
  • 승인 2023.08.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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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가야제국 맹주 아라가야의 땅에 문인들 모이다(3)
2023년 경남문협 찾아가는 문학기행 ‘함안편’ 개회식에서 필자는 경남문협 고문의 자격으로 축사를 했을 때 함안역에 얽힌 이야기를 한 토막하면서 시인들이 만나는 역은 그들만의 인상, 그들만의 이미지가 평생을 가게 되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필자가 만난 함안역의 추억은 그것대로 일생을 흐르는 이미지라고 밝혔다. (축사를 구체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기억은 1970년이나 1971년 쯤 필자는 진주S여고 재직시였는데 아내와 큰 아들 데리고 처가가 있는 함안역에서 내렸다. 아마도 여름방학에 가야읍 말산리에 있는 처가방문 일정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 역사(驛舍) 개찰구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 갓들어온 반대쪽 열차(진주행)가 진주를 향해 발진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느닷없이 “강 형! 강 형!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합창으로 혹은 교대로 불러대고 있었다. 좁은 함안역에 내린 사람은 10여 명인데 그 중 필자를 보고 떠나가는 열차의 승강구까지 내려 서서 외치는 자들은 필사적이었다 이들은 여름 양복 윗도리를 벗어들고 빙빙 돌리며 강형, 강형, 하고 간절한 메시지를 오직 강형 발음에 집중하고 있었다.

필자는 귀청이 좋아 아 너그들 진주로 먼저 가 있어라! 곧 따라가겠다는 표시를 해주었다. 나도 윗도리를 벗어 빙빙 돌려 주었다.

진주를 방문하는 두 사람은 필자의 동국대 2년 후배들이었다. 한 사람은 1968년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동시 당선한 M군(찬란한 이력)이고 한 사람은 월간 《현대문학》에 소설로 오영수 작가의 추천을 받은 신진 H군이었다(당시는 어디 큰 산맥의 작가와 자웅을 겨룬 인재). M군은 서울 마포 어디 교사였고 H군은 온양여중 교사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만나 선배 K가 사는 진주를 만만히 보고 공략을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 두 사람은 천하를 잡고 흔드는 기백으로 무슨 일이든 꾸미고 싶었던 것이다. H군은 뒤에 소설가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평론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럴 때 행사때 만나면 “강형! 나는 평론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잘나가는 시인이라도 슬슬 길 생각을 해야 될거요!”하고 필자에게 예사로 겁박을 주었다. M군은 원주고등학교(오탁번과 동기)를 나와 서라벌에서 시를 쓰다가 3년 편입으로 동국대 국문과로 왔는데 졸업기에 있는 필자를 보면 슬슬 외면하면서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누군가 후배 하나가 “너 왜 강선배에게 인사를 해야지” 하는 말에 “나는 지금 인사를 안한다. 내가 강선배만큼 될 때 인사를 해도 늦지 않다”고 응수하는 놀라운 반응을 보인 후배다.(필자는 이 무렵 후배 중에서 누군가가 강 선배는 동국대 60년대 황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를 받아 필자는 동대신문 졸업 칼럼에 <60년대의 황제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 썼다. M군이나 필자는 다들 신들리듯 학창을 누린 것이었다.

함안 처가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필자는 두 후배를 만나러 진주로 가서 이 두 사람을 여관에서 나오게 하여 진주 칠암동 하숙(당시 집사람은 고향 중학교 근무중)에 함께 있기로 하고 질펀히 놀러다니기로 했다. 하숙에는 필자가 밥값을 따로 쳐드리기로 했다.

이 사람들은 별 스케줄도 없이 진주성 촉석루와 남강, 의암(제1경, 제2경)을 기본 필수로 하고 시가지, 둑방길(서장대에서 이현동 다리)을 걸었다. 그들이 아무런 스케줄도 없이 왔으므로 아직 진주 생활에 어떤 개미를 몰랐던 필자로서도 대책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를 쓰기 시작한 뉴페이스 여류를 소개해 주게 되었다. 자연스레 시인끼리의 랑데부가 시작되었다.스케줄에 표시되지 않은 긴장감이 생기고 둔치를 낭만적 첫언덕으로 삼는 듯했다. 우리는 그 언덕이나 모랭이 길에서 빠져 주었다.

이 무렵 M군은 신진 Y녀의 중앙문예지 어디 다리를 놓겠다는 것인지 심사 없이 게재 방법을 마련한 것인지 일 듯 모를 듯한 말을 하곤 했다.(사랑에 빠지면 성령언어처럼 하는 것!) 강형! Y녀의 실력이 대단해요, <특집 5편> <신작 5편>으로다가 실려야 하는데, 하는데… 하고는 당당한 신인으로 인정을 해놓고 있었다. 중앙지 누구만큼은 넘어 섰어요, 누구만큼은 연조가 연조인지라… 해가며 신나게 자가 편집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에 진주공략을 끝낸 것인지 후배 두 사람은 진주를 떠났다. 선풍기 하나로 셋이서 서로 자기에게 끌어들이는 하숙에서의 전쟁도 끝나고 우리는 처음 윗도리 벗어 흔들던 기분으로 진주역에 닿아 서울역표 두 장을 끊었다. 필자는 M군의 표정에서 데이트 실적이 원만하지 않음을 알아채었다. 후문에는 Y녀 집안의 남성보초가 실력발휘를 했다는 코드 없는 풍문이 들려왔다.

그 뒤 필자는 경상대학교라는 남도 거점 국립대학에 사령장을 받고 첫 번째 ‘경상대신문’ 교수 칼럼을 쓰게 되었다. 제목은 <소설가의 요설(饒舌)>이었다. 애매한 제목이고 안개를 치는 기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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