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잊으면 모두 그만인 것을
[경일포럼]잊으면 모두 그만인 것을
  • 경남일보
  • 승인 2022.08.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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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앞으로도 간행해야 할 계획된 책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50권 이상의 저서를 간행한 내게 물었다. 뭔 책을 그렇게 많이 내셨냐고. 농담 삼아, 비결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내 글쓰기 욕망의 두 수레바퀴야말로 호기심과 기억력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실제로 그런 것 같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보니, 호기심이 많다는 게 좋은 건지, 기억력이 좋다는 게 정말 좋은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중반이었던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을 볼 때, 이런 대사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번뇌가 많기 때문이야.” 내 삶을 돌아보면, 내게 번뇌가 남보다 훨씬 많았던 건 아닐까. 아, 그렇구나! 나는 그때 내 기억력의 좋음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로구나 생각했다.

나는 1986년부터 1998년까지 매우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왔다. 나는 이 긴 12년 동안에 걸친 나에 관한 기억을 지금도 너무 환하고, 또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쪼들렸고, 혼자여서 외로웠고, 신분이 불안해서 사회인으로서 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공자의 어록인 ‘빈이무원난(貧而無怨難)’처럼, 가난하면 누군가를, 아니면 사회를 원망하기 십상이다. 사마천이 ‘발분저술’한 결과가 ‘사기’인 게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자칫 곡해하면, 이것은 글쓰기의 본령이 타인을 신랄하게 비난하거나 알량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하는 데 있다고, 사람들을 착각하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의 가난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는 마음이 바로 자유로운 마음이다. 자유(自由)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는 것’, 이를테면 내 탓임을 깨닫는 데 있다. 또한 발분저술 역시 분한 마음을 발산하는 게 아니라, 이를 초월하기 위한 글쓰기의 소중한 정신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그 12년 동안에 10권 이상의 저서에 해당하는 원고를 썼다. 내 글쓰기가 발분저술의 경지에 나아가지 못했어도, 원망이나 자기 연민의 표출은 아니며, 분한 마음의 발산은 더욱 아니었다고 본다. 이 어려운 시기를, 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로 버텼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영화보기와 노래 듣기도 내 일상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중요한 목록이었다. 특히 그 시대에 활약한 여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어려움과 힘듦을 견뎌냈다. 최진희·이선희·민해경·나미·양수경 등의 노래를 좋아했다.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최진희의 ‘미운 사람’이나, 나미의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등을 즐겨 듣는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간다. 교수가 되기 전의 나는 일고여덟 권이나 되는 저서를 제출하고도 논문 서너 편 겨우 쓴 경쟁자에게 패배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노력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는 늘 공정한 세상이었다. 인간의 뇌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잘 지워지지 않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의 고통은 주박(呪縛)과 같은 나쁜 기억에서 비롯된다. 고통은 마음에 새겨진 문신의 언어요, 나쁜 기억들은 마음의 상처를 담은 크고 작은 그릇들이다. 나미의 노랫말이 내 귓전에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다. 잊으면 모두 그만인 것을, 왜 이렇게 잊지 못하나? 정년퇴임을 바로 눈앞에 둔 나의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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