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7)
  • 경남일보
  • 승인 2016.01.1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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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7)

제 손으로 동력 농기구를 척척 부리며 비닐하우스 농사까지 범위를 넓힌 당찬 여자 호남이도 지금 이 시간에는 가족들의 저녁 준비를 하느라고 식탁 주위를 맴돌 것이다. 젖은 손을 닦으며 달려와서 전화를 받겠지.

양지는 모처럼 푸근해진 마음으로 꽃구름 같은 상상을 피우며 전화통의 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또르르-, 또르르-. 신호음은 계속 흘렀다. 양지는 마른 입맛을 다시며 소리의 흐름을 따라간다.

호남의 걸찬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래도 다른 소리로 둘러 대고 말 것 같은 말, 그립다, 보고 싶다. 목이 멜 것 같았다. 심호흡을 크게 해서 목구멍에 꽉 차있는 덩어리를 누그러뜨렸다.

전화를 걸어 놓고 보니 호남의 존재가 몹시 든든하게 다가왔다. 그 애라면 앞 뒤 재느라고 미적거리는 자신에 비해 썩 명쾌한 언동으로 언니가 고민하고 있는 사안을 그리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성의있게 답해줄 것이었다. 이래서 형제는 많아야 울이 된다고 어머니도 말했던가. 조신스럽지 못하다고 퉁박만 주었던 호남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오늘따라 든든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신호는 계속 흘렀다. 집에 아무도 없을까. 하긴 요즘 농촌은 쌀보리 농사 밖에 짓지 않던 옛날의 농촌과 달라서 가을걷이 후부터 본격적으로 비닐하우스 농사가 시작된다고 했지. 퇴근하는 즉시 들로 호출되어 아내를 돕고 있는 호남의 남편, 아이 대접도 못 받고 혼자 놀거나 집을 보아야 되는 호남의 딸 주영이, 끝없이 구시렁대며 못마땅한 듯 양미간의 도끼자국 주름을 펴지 못하고 사는 호남의 시어머니, 남보다 잘살려면 남보다 몇 갑절 부지런해야 된다던 호남의 말이 떠오르고 그들 가족의 분주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시집 간 다음 해에 주영을 낳고 새댁답지 않은 자단으로 단산을 한 뒤, 그 다음 다음 해에 또 개량 된 농촌주택을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호남이. 적금을 해약하고 곗돈을 보태고 주택자금을 융자 냈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추진력은 그녀의 남편도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었다. 언젠가 무슨 일을 터뜨려도 크게 터뜨리고 말 듯 덜렁거리는 성격 때문에 그녀의 시어머니는 좋은 집이며 편안한 시설도 바늘방석이나 마찬가지라고 늘 비아냥거렸던 일을 떠올리자 양지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인정 많고 싹싹하고, 말과 행동이 똑 같다느니, 호남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많았다.

양지는 머릿속으로 호남에게 들었던 그녀의 집을 그려본다. 관계란 필요에 의해서 지속된다는 말이 맞다. 호남이 먼저 전화했을 때는 성가셨던 통화를 지금은 양지 자신이 먼저 원하고 있다. 대문 앞 전선주에 높이 켜진 보안등의 노란 불빛 아래 시멘트로 포장 된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주영이가 타고 놀던 세발자전거가 마당가에 놓여있고 그 옆에는 포장을 덮은 가건물이 있다. 철을 넘긴 농기구인 이앙기, 보리타작기, 제초기, 농지관리기, 경운기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주영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백오십cc 오토바이도 삐딱하게 세워진 호남이 전용의 스쿠프와 나란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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