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술 (전 산청 생비량초교 교장)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학교는 신비롭고 참 무서운 장소였다. 누런 창호지에 구멍이 숭숭 뚫린 우리집 방문과는 달리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창이며, 골짝 논 수십 배 크기의 넓은 운동장은 나를 기죽게 했다. 생전 처음 보는 바지 입은 여 선생님과 우락부락한 친구들 대하기가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들놈으로부터 손자의 취학 통지서가 나왔다며 책상도 준비하고 처갓집에선 가방과 실내화까지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초등학교에서 평생 밥을 먹고 산 할아버지는 할 일이 없어지는 것 같아 사뭇 서운하기도 했다.
교육이란 좋은 자료를 만드는 것이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어느 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좋은 쇠를 만드는 것이 학교나 부모가 할 일이고, 그 쇠로서 여러 제품이 되는 것은 아이들의 몫인 셈이다. 학교는 규격품인 상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뿐인 작품이 되게 하는 곳이다. 부모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더 좋은 완성품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허영이고 욕심이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입학을 시킨다는 것은 부모로서는 새로운 기대감에 젖겠지만 아이에게는 날이 갈수록 고통이 될 것이고 부모의 기대도 차츰 실망으로 전환될 것이 분명하다.
초등학교 성적은 어머니 성적이고 중·고등학교 성적은 학원성적이라는 우스운 말이 있다. 갓 입학하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부모가 해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보조자의 구실을 해야지 끝까지 도와주다 보면 의타심 많은 수동적 인간이 되어 버린다.
내 경험으로 보아서는 입학 전에 많이 알고 오는 아이보다는 모르고 오는 아이가 생활이나 학습에 더 잘 적응하니 부모는 너무 간섭 말고 학교에 모든 것 맡기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요구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품은 꿈의 크기대로 자라는 것이다. 또 학교는 교육의 전문가인 집단이니 의심하거나 내 아이가 손해보지 않느냐는 자기중심적 생각에 젖지 말라는 것이다. 빠르지는 않더라도 차근차근 학교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부모야말로 자식을 바로 키우는 방법이다.
오래 묵은 앨범에서 몇 십 년 전의 아들의 취학 통지서와 입학사진을 보며 엄마의 손을 잡고 교문을 들어서는 손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혹시 교문을 나오다 참고서나 선행 학습지를 사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우리 손자의 학교생활이 정말 신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최원술·전 산청 생비량초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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