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밥
물 밥
  • 경남일보
  • 승인 2012.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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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범 (창원시의원)

“야, 이놈아! 냉수에 밥 말아 먹고 정신 좀 챙겨라.” , “야, 저 친구 저 양반 밥맛이다.”

평소에 엉뚱한 짓을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다. 얼마나 밥맛이 없으면 그런 일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겠는가. 사람이 사는데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 밥이라고 생각할 만큼 밥은 중요하다. 요즘 밥보다 더 좋은 먹을거리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잦은 외식으로 화학조미료 맛에 길들어져 있다. 피자,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를 즐겨 먹는 신세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배 고파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밥 냄새는 고리타분하고 싱거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싸주신 벤또(도시락)를 누구나 한번쯤은 놓아두고 그냥 가서, 그날 점심을 굶고 허기져 녹초가 되고 후회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침에 알루미늄 도시락 뚜껑을 살짝 열어보고 보리가 쌀보다 훨씬 많을 때면 으레 가지고 가지 않았다. 친구들 보기 창피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구수한 밥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는 쌀밥이야말로 어릴 적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옛날 쌀이 귀하던 시절 보리쌀을 먼저 삶아 대소쿠리에 많이 해 담아 놓고 매끼 밥을 할 때마다 솥에 물을 붓고 보리쌀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쌀을 조금 얹어서 밥을 했다. 밥을 다해서 밥상에 올려 놓을 때는 아버지 밥그릇에 보리쌀을 조금 섞어 그 위에 흰 쌀밥을 담고 나면 어머니와 우리들은 거의 흰쌀이 많이 섞이지 않은 보리밥이다.

밥상은 따로 차려진다. 아버지 밥상, 식구들 밥상. 매끼 식사 때마다 아버지의 밥상에 놓인 흰 쌀밥 그릇은 곁눈질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행운이었다. 귀하게 낳은 아들이다 보니 아버지는 항상 자기 밥상으로 옮겨 와서 밥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흰 쌀밥을 몇 숟가락 퍼 주신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진학해 공부할 때다. 꽤나 잘사는 친구집에 놀러 갔다. 친구집에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밥그릇이 유난히 작게 보였다. 보통 밥그릇의 절반밖에 안될 것 같았다. 흰 쌀밥 한 그릇을 후다닥 먹었다. 한참 먹을 때라 양이 차지 않았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더 먹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더 먹고 싶은 마음이야 꿀떡 같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밥상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용기 없는 나 자신을 원망하며 배고픈 하루를 보냈다.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나에겐 아내와 딸과 아들 네 식구가 있다. 네 식구가 먹는 한달의 쌀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와 직장 다니는 딸아이는 아침을 잘 먹지 않고, 아들은 기숙사 생활하는 탓에 주말이라야 오고 아내혼자 식구 없는 식탁에서 아침 몇 숟갈이 고작이다. 저녁 역시 손님 만난다는 핑계로 매일 늦게 귀가하니 쌀 소비가 될 수가 없다.

그렇게 귀하고 먹고 싶었던 쌀밥이 요즘은 경시당하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세태인 것 같다. 한여름 날이 더우면 식욕이 떨어진다. 끼니 때마다 무얼 먹기는 먹어야겠는데 어떤 때는 자다가 일어나 밥상 앞에 앉아 끄덕끄덕 조는 것처럼 당최 먹는 일 자체가 싫어질 때가 있다. 오늘 점심을 먹고 친구한테 안부전화 겸 “잘 있소, 밥은 먹었능기요?” 친구 왈 “아이구 더워서 밥맛도 없고 뭘 먹을까 생각중이요”라는 말이다. “밥맛 없으면 물에 말아 묵어소” 하고 안부전화를 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은 배탈 날까봐 찬물에 밥 말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식욕이 나지 않으면 밥에 물을 붓는다. 보통 ‘물밥’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물밥은 굿을 할 때 무당이 귀신에게 준다고 물에 말아 던지는 밥을 말하고, 제사 때에도 마지막에 물밥을 만들어서 집 대문 옆에 놓아 두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물에 말아 먹는 밥은 몇 번 씹지 않아도 술술 넘어간다. 별다른 반찬도 필요 없다. 텃밭에서 따온 적당히 매운 고추 몇 개만 있으면 된다. 밥 한술 뜨고 된장에 찍은 고추 깨물고 입안에 도는 매운맛 달래기 위해 또다시 밥 한술 뜨다 보면 어느새 빈 그릇이 된다.

여름철 먹는 것도 부실하고 뱃속 역시 좋을 리는 없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힘쓸 리도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어른들은 물에 밥 말아 먹는 머슴이나 일꾼은 절대 두지 말라고 했던가. 요즘같이 먹을거리가 많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많이 섭취하는 이 마당에 여름철 한끼 밥맛 없을 때 우리들의 어린 시절처럼 물에 밥 말아서 풋고추와 된장의 한끼 식사도 괜찮을 성싶다.

강용범 (창원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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