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달걀 한 판과 V가 의미하는 것
[경일시론]달걀 한 판과 V가 의미하는 것
  • 경남일보
  • 승인 2021.02.1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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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0년도 더 된 일로 기억한다.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가 같은 당 경선 후보에게 시내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질문을 받았다. 재벌가의 후예였던 그는 70원이라 답했고, 이는 오랜 기간 그 정치인을 비웃는 에피소드로 쓰였다. 그 당시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현금 기준 1000원이었고, 그 정치인은 시내버스를 자기 돈 내고 타본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이미 교통카드가 널리 보급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교통카드를 쓰면서 잔액 확인을 하거나 카드가 정확히 찍혔는지는 신경 쓰면서 실제 버스 1회 요금이 얼마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의외로 있었다. 그럼 요즘 시내버스 요금은 얼마나 할까? 필자가 살고 있는 진주를 기준으로 현금 1500원, 교통카드로는 1450원이다. 그럼 시내버스 요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서민의 일상을 제대로 살피고 있는 소위 ‘훌륭한 정치인’의 자격을 갖춘 것일까?

며칠 전 대정부 질문에서 민생 물가에 관한 물음들이 쏟아졌다. 택시 기본요금은 얼마인지, 현금 기준 버스비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국토교통부 장관은 1200원이라고 답했지만, 역시 틀린 답이었다. 그러던 중 달걀 한 판 가격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급등한 달걀 가격에 대해 총리는 ‘놀랍게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질문자를 순간 머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코로나를 겪고 있는 우리들이 듣고 싶은 질문과 대답이 정말 이런 것이었을까?

갈수록 전문화, 세분화되는 세상에서 우리 일상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무심하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특별히 트집 잡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택시 기본요금에 대한 문답의 기준은 언제나 ‘서울’인데, 지역의 택시요금에 대해 중앙 정치인들이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오히려 가서 묻고 싶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 비싼 달걀 값도 매장마다, 지역마다 판매 시점마다 조금씩 그 가격이 다르니, 달걀 한 판 가격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민생을 살피는 훌륭한 관료나 정치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질문이 오가는 속에서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가격 상승의 요인과 해결책,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는 정치인과 관료의 미래 지향적 정책 방향성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인이나 관료가 세상의 큰 그림과 미래를 위해 소소한 일상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최근 서울 시장에 출마하는 모 당의 후보가 원전 비리 의혹 파일명에 적힌 ‘V’자를 가리켜 소위 청와대의 ‘VIP’를 지칭한다고 했다가 큰 비웃음을 샀다.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다 안다. 파일명에 붙는 ‘V’가 ‘Version’의 약자로 쓰인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상식 중의 상식이다.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거의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V’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 후보는 전직 시장이다. 그 ‘V’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은 그가 단 한 번도 자기 손으로 문서 작성을 해보지 않았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즉 그가 세상에 대해 제안하는 원대한 계획과 구상의 대부분이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어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정치인 혹은 관료들은 언제나 소위 ‘아랫사람’이 프린트해서 가져다주는 문건에 서명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책임자로서 단순히 서명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문건을 직접 만들고 그 의미를 살필 때, 버스요금을 포함한 수많은 민생 관련 질의응답 속에서도 우리가 듣고 싶은 진짜 삶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일은 자기 손으로 해야 한다. 남이 가져다주는 보고서를 읽고 서명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서유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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