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공공기관에 좋은 한글 글씨를 걸면 안 될까
[경일포럼]공공기관에 좋은 한글 글씨를 걸면 안 될까
  • 경남일보
  • 승인 2024.06.2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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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홍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임규홍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경남 고성에 가면 당항포가 내려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경남교육청종합복지센터가 있다. 경남 초중등교직원을 위한 복지센터다. 시설도 좋고 이용료도 저렴해 많은 교직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교사였던 친구들과 그곳에서 자주 만나곤 했다. 그런데 그곳을 들어설 때마다 늘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복지센터 입구 높은 곳에 걸려있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문으로 쓴 큰 액자다. 서화담 서경덕의 독서유감이란 한문글이다. 글 내용도 좋고 글씨도 잘 쓴 것으로 보이지만 한문을 그것도 흘림체로 써놓아 명색이 대학 교수였던 나도 무식해서인지 무슨 뜻인지 선뜻 알 수 없었다. 공공기관 그것도 미래 인재를 키우는 경남교육자들이 들락거리는 복지시설에 남의 글로 된 누구도 쉽게 읽지도 못하는 글을 굳이 걸어놓아야만 했을까. 조상들이 쓴 좋은 글들을 한글로 멋지게 써서 걸어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볼 때마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뿐 아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수많은 정부부처나 여러 공공기관에는 기관장의 집무실이나 입구 등 공간에 좋은 글이나 사진들을 붙여 꾸며놓기도 한다. 그런데 일일이 찾아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곳에 한자로 된 병풍이 놓여 있거나 넉 자로 된 큰 한자글들이 걸려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슨 뜻인지 쉽게 알 수 없는 글들이다. 어떤 국회의장실에는 여덟 폭 한자 병풍이 놓여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국회의장실에는 훈민정음 서문글이 걸려 있었다.

조상들이 쓴 한문 글이나 한문체 서예글을 폄하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공공기관 공간에 어떤 글이나 그림, 사진으로 꾸미는가는 온전히 기관장의 뜻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자면 공공기관의 공간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공공의 것이다. 공공기관에는 한자를 배우지 못한 수많은 우리 국민들이 오가는 곳이다. 어려운 한자(漢字) 한 자, 한문(漢文) 한 줄 읽기 어려운 글보다 공공기관의 정신이 담긴 것이든지 최소한 공공의 뜻에 맞으면서 누구나 감명받고 쉽게 알 수 있는 글이면 좋지 않을까.

공공기관은 모든 국민이 사용하는 공간일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오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집무실이나 회의실, 기관 입구에 남의 글자인 한자로 된 글들만 빼곡히 걸려 있다면 외국인이 그걸 보면서 뭘 생각할까. 혹시라도 대한민국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국을 받들고 한자를 숭상하는 그런 민족으로 보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근 대통령 책상 앞에 이름 대신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는 영어로 된 이상한 글판을 놓은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니 누구보다도 말과 글에 신중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고유한 말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겨레이고 국가가 아닌가. 아직도 글자 권위의식과 선민의식이나 글자 숭배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부터 역대 대통령들 중 한자 글씨를 자랑하는 대통령은 있어도 한글 글씨 쓰기를 자랑하는 대통령은 보지 못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글로 멋진 글을 써서 자기 집무실에 걸어놓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국회를 비롯한 수많은 대한민국 위정자들과 공공기관장들의 그 호화로운 집무실에 멋진 한글 고체나 흘림체로 쓴 좋은 글들을 걸어 놓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기대일까.

어떤 사람은 뭐 개인 집무실 장식으로 글까지 시시콜콜 따지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우리의 정신이고 자존심이며 우리 겨레의 모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정부 공공기관 건물 안에 혹시라도 좋은 글을 장식하고자 한다면 멋진 한글 글씨를 걸어 놓았으면 좋겠다.

지금 공공기관 건물 안 입구에 어떤 글이 걸려 있으며 기관장들의 집무실에 어떤 글들이 걸려 있는지 한번 둘러보자. 뜻도 모르는 한자글을 걸어 놓고 누가 쓴 글이고 무슨 뜻이라면서 우쭐해 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글자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글자살이는 한문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조상들이 쓴 한문으로 된 수많은 글들도 귀중한 우리의 문학이고 자산이다. 그러나 한문을 배우고 한자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과 다른 곳도 아닌 공공기관에 한자와 한문글들만 걸어 놓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한문 글씨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한글 글씨 쓰기를 사랑하고 우리말과 우리글 한글을 아끼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말만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다고 외치지 말고 말글살이부터 국민을 위한 참된 민주주의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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