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 다녀온 덕유산 눈꽃 산행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곤돌라를 타고 향적봉에 올라간 뒤 내려올 때는 배꼽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백련사 쪽으로 내려와 어사길을 걸어서 무려 7시간이나 결려 구천동 주차장에 도착한 적이 있다. 낭만적인 순백의 눈길이 극한의 고행을 겪게 한 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구천동 어사길을 겨울이 아닌 시기에 걷는 묘미와 어사길에 담긴 어사 박문수의 덕행을 만나기 위해 멀구슬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탐방을 떠났다.
조선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충청도를 거쳐 무주 구천동에 이르게 되었다. 구천동에는 구씨와 천씨가 살고 있었는데 구씨는 한양에서 내려온 이주민이었고, 천씨는 구천동 토박이였다. 천씨는 토박이로서 텃세를 심하게 하고, 심성도 흉포한 사람이었다. 구씨 집 며느리가 탐이 난 천씨는 ‘구씨 집 아들이 우리 며느리를 유인해 납치해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면서 자기 아들이 구씨 집 며느리를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힘이 약한 구씨는 며느리를 잃느니 차라리 모두 죽자고 체념하였다. 때마침 암행어사 박문수가 늦은 밤에 불이 켜진 집을 찾아가니 구씨 집이었고, 억울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다음날 천씨 집에서는 구씨 집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한 혼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암행어사 출두야!” 소리와 함께 박문수가 나타나 구씨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었다. 이후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구씨 성과 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잘 어울려 살게 되어 이 마을을 ‘구천동’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 외에도 삼한시대부터 9000명의 호국무사들이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주둔했다고 하여 구천인(九千人)의 둔지(屯地)라는 의미의 ‘구천둔(九千屯)’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구천동(九千洞)’이 됐다는 설도 있다.
◇박문수의 덕행이 스민 아름다운 어사길
구천동의 지명 유래담과 암행어사 박문수의 인물담이 결합해서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서로 화합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민중의 바람과 함께 암행어사 박문수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구천동 어사길’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천동 주차장-구천동탐방지원센터-어사길 입구-비파담-안심대-명경담-백련사’까지 6.4㎞ 구간을 원점 회귀하는 12.8㎞를 트레킹(걷기 여행) 하기로 했다.
덕유산의 구천동계곡은 설악산 천불동계곡, 지리산 칠선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계곡 중 하나로 꼽힌다. 어사길은 구천동계곡에 안긴 계곡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구천동 주차장에서 1.5㎞ 정도 걸어가자 암행어사 차림의 노인 한 분이 어사길 입구에서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길고 허연 수염에 삿갓을 쓴 모습이 정말 어사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다소 굵어지자 준비해 간 비옷을 입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경사가 완만해 나들이하는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1구간인 ‘숲나들길’을 지나, 계곡과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치가 일품인 2구간인 ‘청렴길’은 비파담을 비롯해 큰 바위 둘 사이에 난 지혜의 문과 소원성취의 문, 그리고 소원성취의 탑을 만날 수 있는 구간으로 어사길 최고의 풍치로서 손색이 없는 길이다.
◇속을 비운 채 성자처럼 선 백련사 돌배나무
숲나들이와 청렴, 치유와 하늘 세계를 단계적으로 닿게 하는 ‘구천동 어사길’, 그 길의 대단원을 맺는 백련사에서 하늘 세계가 펼치는 세상을 마음 가득 담고 싶었다. 신라 신문왕 때,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던 백련선사의 은거지에 새하얀 연꽃이 피었는데 연꽃이 핀 자리에 선사가 절을 짓고 백련사라 불렀다고 한다. 우화루 앞에는 수령 500년은 족히 됨직한 돌배나무 한 그루가 속을 텅 비우고 수피의 힘으로 꼿꼿하게 서서 수행 정진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니 필자도 돌배나무의 모습을 닮아가는지 여러 생각들로 가득 찼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를 피해 요사채인 문향헌 툇마루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건너편 산마루를 두껍게 감싸고 있던 구름이 사라지자 산의 짙푸른 이마가 드러났다. 구천동 어사길을 걸은 필자에게 녹음을 선물로 건네주는 것 같았다. 비 갠 백련사 경내를 걸으면서 산마루에 앉은 구름이 일고 사라지는 이치와 골이 깊을수록 물소리가 깊어지는 까닭에 대한 화두를 안고 걷는데, 속을 다 비운 채 선 돌배나무 야윈 잎들이 빗방울을 털며 무거운 생각들을 모두 걷어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내려오는 길이 온통 빗물에 젖어있는데도 필자의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박종현 시인, 멀구슬문학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