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우리 말과 글은 되찾았지만, 일본식 용어의 잔재와 과도한 외래어 사용 등으로 일상에서 쓰이는 우리 말과 글은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다. 진주에서 우리 말과 글을 살리자는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강병환 ㈔토박이말 바라기 으뜸 빛(대표)은 “민족적 자존심이 강하고 우리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진주 정신이 오늘날 겨레의 얼인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고 지키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자…1973년 배달말 학회 결성
현재 우리의 말과 글에는 한자어와 일본식 용어를 비롯한 각종 외래어가 대량으로 유입돼 있는 상황이다. 해방 직후 우리 교과서에 일본식 용어를 배격하고 순우리말과 글을 가르쳐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제기됐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현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 지면서 오늘날 한글로 쓰여 있지만 그 문장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력 논란’으로 불거지고 있다.
이를 바로잡고자 진주에서 우리 말과 글을 살리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시간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상국립대학교 전 국어교육과 교수였던 려증동 선생과 김수업 선생은 전국 어느 대학, 누구보다 앞서 1973년 배달말 학회를 세우고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사랑에 뜻을 같이했다.
배달말 학회는 지금 전국 규모의 학술단체로 성장하며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이후 진주에는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는 여러 단체가 결성됐다. 대표적으로 1994년에 ‘진주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이 수년간 활동했고, 2013년에는 ‘사단법인 토박이말 바라기’가 결성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에서 활동한 이우기 경상국립대 홍보실장은 “당시 국어국문학과 동문이 많이 참여해 진주지역 회원들을 모아서 우리 말과 글 회보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라고 말했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는 첫 번째 조건은 정확하게 쓰고 이해하는 것이다.
1998년 첫 발령을 받고 교직생활을 시작한 이창수 진주 지수초교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교과서에 적혀 있는 말들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교사는 “이유를 찾아보니 그 뿌리가 일제시대 사용한 일본식 용어와 한자어 등에 있었다. 국어사전에서 풀이한 말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고서 마치 제2의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토박이말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진주 곳곳에 토박이말 발자취진주에는 곳곳에 우리 말 사랑의 발자취가 하나둘 새겨지고 있다. 진주 신안평거녹지공원에는 토박이말로 이름 지어진 ‘한뜰 공원’이 있다. ‘한뜰’은 큰 공원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공원에는 진주가 토박이말을 살리자는 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라고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지난 2022년 4월 진주시와 진주교육청, ㈔토박이말 바라기, 진주YMCA가 힘을 합쳐 조성했다.
산책로에는 시민들이 연중 사용하기 좋은 토박이말을 소개하는 팻말 등이 설치돼 있다.
인근의 신진초등학교는 학생들의 토박이말 작품으로 학교 울타리를 꾸며 놓았으며 도심의 지하상가를 비롯해 곳곳에 토박이말 배움터를 조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토박이말 운동을 배우러 전국에서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진주시는 앞으로 지역 공원과 녹지 등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산책로 주변에 토박이말 나무 이름표와 알림 널(안내판)을 설치해 참 우리말인 토박이말을 알리기 위한 사업을 계속해서 전개할 예정이다.
◇토박이말 날 지정…지역 특색 교육 활성화
토박이말의 전국적인 보급 확산을 위해서는 앞으로 진주에서 관련 전문가를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창수 교사는 “많은 교사가 우리 말과 글 교육에 관심이 있다. 교육도시인 진주의 대학에 토박이말을 배울 수 있고, 또 가르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대학원, ‘아우름’이 설치된다면 토박이말 확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토박이말 확산도 하나 둘 성과를 내고 있다. ㈔토박이말바라기는 지난 2017년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말의 소리’라는 책을 펴낸 1914년 4월 13일을 기념해 한글날(10월 9일)에 이어 매년 4월 13일을 토박이말 날로 지정하고 각종 부대행사를 열고 있다.
2018년에는 경남도교육청이 전국 최초로 토박이말 이끎 교육청을 선언하고 산하 진주교육지원청을 비롯해 교육과정에 연계한 토박이말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22년에는 ‘2022 개정 국어과 교육과정’에 토박이말 관련 성취 기준이 반영되었으며,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한 대통령실의 명칭 공모에서 ㈔토박이말바라기에서 제안한 ‘바른 누리’, 공정하고 바른 세상을 뜻하는 이름이 최종 후보 5개에 포함되기도 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상국립대학교의 전신인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서 근무했던 김수업(1939~2018)교수와 려증동(1933~2020)교수는 1973년 배달말 학회를 만들고, 당시 대학 교육과정에서 획기적이었던 배달 말과 글 교육을 가르쳤다.
려증동 교수는 ‘한일합방’과 ‘독립’이 아니라, ‘경술국치’와 ‘광복’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특히 가정에서 제멋대로 쓰는 언어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수업 교수는 우리 말의 올바른 활용과 보급에 평생을 바쳤으며 특히 ㈔토박이말바라기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토박이말의 보급과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려증동 선생은 ‘국어교육론’, 김수업 선생은 ‘배달말 가르치기’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며 우리 말, 글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임규홍 경상국립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진주가 우리 말과 글을 살리는 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앞서 활성화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분의 우리 말, 글 사랑이 큰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