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규 진주향당 고문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獨立軍) 안옥윤이 묻는다. ‘왜 동지를 팔았나?’ 밀정(密偵) 염석진이 고해성사하듯 대답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안옥윤이 권총을 겨누며 차갑게 말한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밀정 염석진은 그렇게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에게 묻는다. ‘강인국과 가와구치 둘만 죽이면 독립이 되는가?’ 안옥윤이 답한다. ‘모르지. 근데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돈 때문에 뭐든지 하는 당신처럼 살 수는 없잖아.’ 하와이 피스톨은 목숨을 걸고 안옥윤을 구한다.
영화 암살은 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광복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무기력감과 현실 순응이라는 핑계로 친일파라는 당시로서는 주류의 길을 걷기도 하고, 광복의 희망을 끝끝내 부둥켜안고 독립군이라는 비주류의 삶을 선택하기도 했다. 근데 후일 역사는 평가한다. ‘시대의 흐름만 쫓다가 역사의 흐름을 놓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시대는 잘못된 선택을 해도 역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역사는 ‘광복’을 통해 비주류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해 냈다.
홀로코스트의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나는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강변했다. 자신의 행위는 오직 국가적 공식 행위였으며, 맡은 바 책임을 다했기에 무죄라는 것이다.
재판을 지켜본 독일계 정치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유대인 학살 행위가 관료의 출세욕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악이란 특별히 악한 존재 혹은 악한 무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무사유(無思惟)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여기서 천망회회(天網恢恢)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그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 하나 낱낱이 역사에 기록한다. 절대로 역사를 경원시(敬遠視)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류와 비주류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매 순간 주류와 비주류의 길을 고민하게 만든다. 잔인한 일이다. 비주류이기를 강요하는 일도 당연시되고 있다. 이른바 백성을 그물질하고 있는 시대이며, 맹자가 말한 망민(罔民)이 바로 이것이다. 백성들의 생업을 빌미로 법과 제도를 이용해 ‘주류와 비주류’로 가르는 것이 바로 ‘백성을 그물로 잡아들인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인 에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땅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이다.’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역사(歷史)와 정의(正義)의 가치를 믿는 시민들의 힘에 기초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화 밀정에서 안옥윤과 염석진의 삶이 달랐던 이유는 ‘시대와 역사를 판단하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거부하고 기꺼이 광복이라는 역사의 정의를 선택한 비주류 안옥윤과 시류에 편승해 친일파라는 주류의 길을 선택한 염석진의 삶이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역사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혹시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면 된다. 주류인지, 비주류인지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주류와 비주류도 없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진주대첩광장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안옥윤에게 묻는다. ‘강인국과 가와구치 둘만 죽이면 독립이 되는가?’ 안옥윤이 답한다. ‘모르지. 근데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돈 때문에 뭐든지 하는 당신처럼 살 수는 없잖아.’ 하와이 피스톨은 목숨을 걸고 안옥윤을 구한다.
영화 암살은 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에 대해 질문하고 답한다. 광복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무기력감과 현실 순응이라는 핑계로 친일파라는 당시로서는 주류의 길을 걷기도 하고, 광복의 희망을 끝끝내 부둥켜안고 독립군이라는 비주류의 삶을 선택하기도 했다. 근데 후일 역사는 평가한다. ‘시대의 흐름만 쫓다가 역사의 흐름을 놓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된다. 시대는 잘못된 선택을 해도 역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역사는 ‘광복’을 통해 비주류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해 냈다.
홀로코스트의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나는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고 강변했다. 자신의 행위는 오직 국가적 공식 행위였으며, 맡은 바 책임을 다했기에 무죄라는 것이다.
재판을 지켜본 독일계 정치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유대인 학살 행위가 관료의 출세욕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악이란 특별히 악한 존재 혹은 악한 무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무사유(無思惟)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여기서 천망회회(天網恢恢)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그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 하나 낱낱이 역사에 기록한다. 절대로 역사를 경원시(敬遠視)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류와 비주류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매 순간 주류와 비주류의 길을 고민하게 만든다. 잔인한 일이다. 비주류이기를 강요하는 일도 당연시되고 있다. 이른바 백성을 그물질하고 있는 시대이며, 맹자가 말한 망민(罔民)이 바로 이것이다. 백성들의 생업을 빌미로 법과 제도를 이용해 ‘주류와 비주류’로 가르는 것이 바로 ‘백성을 그물로 잡아들인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인 에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땅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이다.’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역사(歷史)와 정의(正義)의 가치를 믿는 시민들의 힘에 기초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화 밀정에서 안옥윤과 염석진의 삶이 달랐던 이유는 ‘시대와 역사를 판단하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거부하고 기꺼이 광복이라는 역사의 정의를 선택한 비주류 안옥윤과 시류에 편승해 친일파라는 주류의 길을 선택한 염석진의 삶이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주류와 비주류로 사는 법은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역사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혹시 그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면 된다. 주류인지, 비주류인지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주류와 비주류도 없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진주대첩광장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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