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경남서부보훈지청 공동기획
“휴전 선언, 전쟁의 끝은 아니었어”
“휴전 선언, 전쟁의 끝은 아니었어”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기간을 의미한다. 우리 주변에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로 달려간 영웅들이 있다. 이에 경남일보는 경남서부보훈지청과 함께 6·25 참전용사가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1933년에 태어나 올해 91세인 진주 출신의 모의출 씨. 어느새 아흔이 넘는 나이지만 그는 6·25전쟁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20세의 나이에 군 입대 영장을 받은 그는 멀리 제주도에 있는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96일간 제주도에서 매일같이 힘든 훈련을 받았지만 수료하기 몇일 전 휴전이 선언됐다.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도 잠시, 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곳곳에서 북한군 패잔병·무장공비들과 총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훈련소를 마친 그는 부산에 주둔한 부대에 배치를 받고 공비토벌 임무에 투입됐다. 그는 “공비들이 지리산 일대에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맘 편히 있지도 못하고 피해도 참 많이 봤다”고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무장공비와 우리 군인을 구분하기 힘들어 했다는 기억도 떠 올렸다. 국군의 토벌에 밀린 공비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주변 민가를 습격해 식량을 탈취했다. 아침이 되면 마을 곳곳에는 무장공비들이 약탈한 음식들을 먹고 남긴 흔적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휴전 선언으로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드넓은 지리산 일대에 숨은 무장공비들을 소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공비들이 보통 소대 단위로 움직였는데, 거의 16명씩 1개 소대를 운영했다. 우리가 1개의 소대를 잡으려고 하면 16명이 8명씩 나눠졌고 그 나눠진 사람들을 잡으려고 하면 4명씩 또 흩어져서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 그가 속해있던 부대는 3개의 중대가 같이 산을 오르며 무장공비들을 반대쪽으로 몰아내고 나머지 중대가 반대편에서 잠복해 기다리다가 도망치는 무장공비들을 기습했다. “기습을 했기에 공비들은 흔적을 지우지도 못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 꼼꼼하고 끈질긴 수색방법이 통한 거지.” 그렇게 소탕한 공비만 80여 명으로 추산했다.
공비 소탕에 나선 그에게도 두려움은 있었다. 가장 힘든 건, 야간에 치고 빠지는 무장공비들 때문에 인식을 잘못해 아군에게 피해를 입힐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자신도 아군이 식별을 잘못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컸다고 했다.
공비 토벌은 그 만큼 피아식별조차 어려웠지만, 그는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완수했다. 공비 소탕 이후에는 강원도 철원까지 올라가 남은 군 복무를 마쳤다.
20대 청춘을 바쳐 조국을 위해 복무한 그는 전역 후 다시 고향 진주로 내려와 농사일을 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6·25 참전 유공자회 경남지부 진주시지회에서 국가유공자로 선정이 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를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을 보면서 새삼 뿌듯함도 느꼈다.
그는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공비도 없었을 것이고, 인명피해도 없었을 것”이라며 “통일이 된다면 전쟁에 대한 위협도 줄어들고 그 돈을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밝혔다.
끝으로 그는 군입대를 앞둔 청년들에게 “군 입대가 다녀온 사람에겐 그 경험이 큰 자랑거리가 됐으면 좋겠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니 자부심을 가지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다녀왔으면 한다”는 격려와 응원의 인사를 전했다.
정리=정웅교기자
1933년에 태어나 올해 91세인 진주 출신의 모의출 씨. 어느새 아흔이 넘는 나이지만 그는 6·25전쟁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20세의 나이에 군 입대 영장을 받은 그는 멀리 제주도에 있는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96일간 제주도에서 매일같이 힘든 훈련을 받았지만 수료하기 몇일 전 휴전이 선언됐다.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도 잠시, 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곳곳에서 북한군 패잔병·무장공비들과 총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훈련소를 마친 그는 부산에 주둔한 부대에 배치를 받고 공비토벌 임무에 투입됐다. 그는 “공비들이 지리산 일대에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맘 편히 있지도 못하고 피해도 참 많이 봤다”고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무장공비와 우리 군인을 구분하기 힘들어 했다는 기억도 떠 올렸다. 국군의 토벌에 밀린 공비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주변 민가를 습격해 식량을 탈취했다. 아침이 되면 마을 곳곳에는 무장공비들이 약탈한 음식들을 먹고 남긴 흔적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휴전 선언으로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드넓은 지리산 일대에 숨은 무장공비들을 소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공비들이 보통 소대 단위로 움직였는데, 거의 16명씩 1개 소대를 운영했다. 우리가 1개의 소대를 잡으려고 하면 16명이 8명씩 나눠졌고 그 나눠진 사람들을 잡으려고 하면 4명씩 또 흩어져서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공비 소탕에 나선 그에게도 두려움은 있었다. 가장 힘든 건, 야간에 치고 빠지는 무장공비들 때문에 인식을 잘못해 아군에게 피해를 입힐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자신도 아군이 식별을 잘못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컸다고 했다.
공비 토벌은 그 만큼 피아식별조차 어려웠지만, 그는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완수했다. 공비 소탕 이후에는 강원도 철원까지 올라가 남은 군 복무를 마쳤다.
20대 청춘을 바쳐 조국을 위해 복무한 그는 전역 후 다시 고향 진주로 내려와 농사일을 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6·25 참전 유공자회 경남지부 진주시지회에서 국가유공자로 선정이 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를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을 보면서 새삼 뿌듯함도 느꼈다.
그는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공비도 없었을 것이고, 인명피해도 없었을 것”이라며 “통일이 된다면 전쟁에 대한 위협도 줄어들고 그 돈을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밝혔다.
끝으로 그는 군입대를 앞둔 청년들에게 “군 입대가 다녀온 사람에겐 그 경험이 큰 자랑거리가 됐으면 좋겠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니 자부심을 가지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다녀왔으면 한다”는 격려와 응원의 인사를 전했다.
정리=정웅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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