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보릿고개 기억
[경일춘추]보릿고개 기억
  • 경남일보
  • 승인 2023.06.08 1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덕대 수필가
이덕대 수필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아픈 기억이 있다. 1963년 계묘년 보릿고개다. 한 갑자가 지난 올 계묘년은 더욱 그렇다. 보리농사는 가물어야 풍년이 든다. 그해 계묘년 보릿고개는 온전히 늦봄부터 시작된 장마 때문이었다. 때 이른 장마로 한 달 이상 수시로 비가 내렸고 익어가던 보리는 대궁에 달린 채 싹이 났다. 비 잦아들기만 기다리던 농부들은 어쩔 수없이 뿌리가 굼실굼실 솟은 보리를 이삭만 끊어와 불을 땐 방에서 말리거나 솥에 쪘다. 온 마을이 보리 썩는 냄새로 쿰쿰하고 뭉뭉했다. 기억 속 그 해 보릿고개는 그렇게 왔다.

대부분 소농들은 벼를 수확과 동시에 수매해 농지세며 수세에 농자재 비용으로 충당하고 이듬해 거둔 보리가 일 년 먹거리였다. 잘 찧은 보리는 쌀 못지않게 먹음직했고 겉보리든 쌀보리든 갓 찧은 것은 삽상한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싱싱한 향을 풍겼다. 그럼에도 보리쌀은 집에 도착하면 앞마루에 내동댕이쳐지거나 부뚜막 위 나무통에 쏟아 부어졌다. 아이들은 보리쌀보다 오히려 함께 쓸어온 보리등겨에 관심이 많았다. 보리개떡을 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리개떡은 아이들에게 그럴싸한 간식이었다. 해토머리에는 땅으로 기어들어 언제쯤 푸른빛을 띠려나했던 보리가 망종 무렵 누렇게 익어간다. 겨울부터 봄까지 이어진 가뭄으로 헤싱헤싱 자라긴 했지만 역대급 혹한을 견디고 이만큼 살아남아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새파란 빛깔이 누렇게 변하고 연하던 까락이 바늘처럼 억세어졌다. 온 산천이 푸르건만 보리밭만은 누렇게 물 든다. 단내와 풋내가 오묘하게 섞인 풋보리를 서리하여 구워먹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에 침이 괸다.

예전 이 시기는 농사준비로 일은 몇 곱이나 늘어나면서 어른들은 고된 일로 배고팠고 아이들은 긴 해에 절로 배고팠다. 먹거리가 없어 걸식하는 이도 흔했다. 허리에 찬 숟가락 소리가 삽짝 근처에서 짤랑거리면 인심 후한 농부는 식구가 먹기도 모자란 밥을 덜어 내주었다. 이제 보릿고개는 전설이다. 세계 곳곳에는 전쟁이 터지고 물가가 다락같이 올라 서민들의 밥상이 점점 초라해진다지만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세상. 코로나로 찐 살을 빼야 한다고 헬스장도 ‘확찐자’들로 북적거린다. 다이어트에 좋다는 기능성 식품 광고가 왁자하다. 식량부족에 따른 굶주림보다 영양과잉으로 인한 비만치료 비용지출이 훨씬 심각하다. 어려웠던 보릿고개를 되돌아보며 절식과 절용으로 건강까지 챙기면 어떨까. 세상에는 아직도 보릿고개를 어렵게 넘는 사람들이 많고 많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