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현장 10] 고문헌에 담긴 효자 정려(旌閭)
[경남의 고문헌 현장 10] 고문헌에 담긴 효자 정려(旌閭)
  • 경남일보
  • 승인 2023.06.0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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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근·하진태·강위성…경남에 살았던 국가 공인 효자들
조선시대에는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열녀·충신이 사는 마을 어귀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전통이 있었다.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에는 효자 표창과 관련한 고문헌을 여러 가지 소장하고 있다. 경남지역 효자 박효근, 하진태 관련 고문헌의 기록을 통해 ‘국가 공인’ 효자 정려가 내려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또한 강위성의 사례를 통해 나라 잃은 시기 효자 정려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자.

◇고성 효자 박효근

1002번 지방도로를 따라 고성군 영오면에서 구만면으로 가다 보면 청광교회가 나오고, 교회 뒤로 돌아가면 ‘박진사 고가’가 나온다.

고가는 긴 담장으로 둘리어 있고,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박효근지문’이라는 붉은 글씨로 쓰인 정려 현판이 대문 위에 붙어 있다. 이 집은 효자 박효근(朴孝根, 1800-1853)이 출생했고, 큰아들 박한회와 손자 박돈병이 진사를 지냈기에 박진사 고가라고 부른다. 박효근의 둘째 아들 박영회도 부친과 같이 정려를 받았으므로 ‘부자쌍효가(父子雙孝家)’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소장했던 고문헌을 후손 박상호 씨가 2005년 고문헌도서관에 기증했다. 그중 박효근 효행 문서를 통해 효자 정려가 내려지기까지 흐름을 알 수 있다.

박효근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는데, 12세 때 부친상을 당했다. 어머니 천 씨가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다. 박효근이 신비한 약초를 먹여 어머니의 목숨을 살렸다. 이에 진주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유생들이 진주목사, 관찰사, 암행어사 등에게 표창을 요청했다. 박효근 정려의 경우 효자가 죽은 뒤 1868년 청원이 시작되어 10년 만에 동몽교관 조봉대부 정려가 내려졌다. 매우 순탄하게 정려가 이루어진 편이다. 여기에는 아들 박한회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박한회도 1885년 효자로 인정되어 마을 인근에 창효각(彰孝閣)이 세워졌다.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박진사 고가 입구
박효근 효행 관련 문서(문화재자료 제350호)
박효근 증직 교지

◇진주 단목 효자 하진태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마을 입구에 ‘효자문’이라 쓰인 정려각이 서 있다.

지난해 진양하씨 창주공파 담산종중으로부터 기탁받은 고문헌 중에 이 정려각 주인인 하진태(1737-1800)가 어머니를 병간호한 기록인 ‘병록일기(病錄日記)’가 있어 이를 경남일보 5월 8일 자에 소개한 바 있다. 하진태는 노모를 50여 일간 극진히 병간호하여 소생시킨 효자다. 단동촌 동장은 하진태의 효행을 사죽리 집강에게 보고했다. 집강은 다시 진주목사에게 보고하고 현양을 요청했다. 진주 목사는 집강이 올린 보고서를 살펴보고, 이 건은 집강이 논의할 일이 아니라 지역의 공론에 따라 추진하여야 한다고 답변하고, 즉각적인 현양을 보류했다.

효행 표창이 늦어지면서 효행 당사자인 하진태는 결국 생전에 효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효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효자 현양 운동은 계속되었다. 1800년에는 진주지역 유림이 진주목사에게 청원했고, 이의조와 송환기가 글을 지어 효행을 선양했다. 1822년에는 현양 운동이 더욱 확대되어 도내 유림들도 참여하여 진주목사와 관찰사에게 상서를 올렸다. 1829년과 1833년에는 암행어사에게 효자 청원을 요청하는 상서를 30여 차례에 걸쳐 올렸다. 이처럼 계속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하진태의 효행에 대한 표창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1875년까지 진주목사·관찰사·암행어사를 통한 청원은 계속되었다. 하진태의 정려는 결국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891년이 되어서야 결정되고, 예조의 입안이 하달되었다. 하진태는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부인 진주강씨는 영인(令人)으로 추증됐다. 진주목사에게 정려 건립을 지시하여 1892년 건립됐다.

 
진양하씨 창주공파 담산종중 안채
단동촌 동장이 최초로 보고한 하진태 효행 기록(유형문화재 제408호)

◇산청 갈전 효자 강위성

2019년 4월. 진주시 평거동 강창구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집에 오래된 문서가 있는데, 소장만 하고 있을 뿐 무슨 내용인지 모르니 방문하여 상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산청군 신안면 갈전리에 사는 효자 강위성(姜渭成)의 효행 정려를 청하는 민원 문서들이었다.

어머니 평택임씨가 병에 걸려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아들 강위성이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어머니의 목숨을 10일간 연명한 내용이었다. 문중 관계자와 마을 주민들은 강위성의 효행을 표창해 달라고 54회에 걸쳐 관아와 관계자에게 청원했다. 문서를 발급한 사람과 받는 사람만 다를 뿐 문서 내용은 한결같이 효행을 설명하고 표창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효자 효부 열녀의 정려는 나라에서 엄격하게 심의하여 내려주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로 합병되어 더는 효자 정려를 청할 곳도, 인정해 줄 곳도 없게 되었다. 효행 정려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민원 문서 외에도 표지에 ‘찬양문’과 ‘찬조문’이라 쓰인 책자 2권이 포함되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성공회(慕聖公會)와 관련된 문서였다. 모성공회는 일제강점기 효자 후손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발 빠르게 움직인 단체다. 모성공회는 경성부 통동 137번지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보급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회장에 김종한, 찬성장에 박기양, 고문에 민병석 등이 운영하고 있었다. 모성공회는 곧 일제강점기 친일파 인사들이 돈을 받고 효자·효부·열녀의 포상을 발급하던 단체였다. 그들은 친일 행각을 숨기면서 가짜 유림 행세를 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이 민족혼인 충효열을 표창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들은 각 지방의 유림을 권유하여 특별회원에게는 10원씩, 보통 회원에게는 1원씩의 돈을 받고 입회하게 하였다. 입회한 회원에게는 효자·열녀인 것을 승인한다는 뜻의 ‘찬양문’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이들은 정해진 양식에 청원인의 이름과 행적을 찬양문에 적어서 내려주었다. 찬양문은 비단 표지에 달필이 쓴 효자의 행적이 적혀 있고, 말미에는 당시 권위 있는 인물 23명의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모성공회에서 발급한 강위성 찬양문


◇모성공회의 찬양문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1926년 5월 20일 기사를 보면, 이들은 전국에서 특별회원 590명과 보통 회원 477명을 모집하여 6500여 원의 입회금을 모금하였다고 했다.

종로경찰서는 이 사실을 알고 모금과 회원 모집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종로경찰서의 금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종로경찰서의 모금 중지는 오보이므로 모금을 계속하겠다는 기사를 신문에 실었다. 그리고 찬양문 발급도 계속했다.

모성공회의 불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명망 있는 인물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인장을 위조하여 운영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매일신보 1926년 6월 10일 기사를 보면, 모성공회에서 귀족들의 인장을 위조해 찬양문을 만들고, 이것을 이용해 세상 물정에 눈이 어두운 시골 사람들을 속여 백 원에서 수백 원을 받고 찬양문을 팔아 이익을 취하다가 검거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찬조문(贊助文)’이라고 적힌 문서를 살펴보았다. 1929년 모성공회로부터 강위성 찬양문을 발급받게 되자 집현면 냉정리에 사는 손자 강맹희가 조부 효자비 건립비를 모금한 기록이었다. 그런데 모금에 동참한 사람은 7명이었고, 모금액도 18원에 불과했다.

찬양문은 국가가 아닌 모성공회에서 발급한 것이었기 때문에 권위나 혜택이 있을 수가 없었다. 효자로 인증만 받았을 뿐 비를 세우는 것은 오로지 문중이나 지역민의 자발적인 부담으로 했고, 관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강창구 씨에게 물어보니 강위성의 효자비는 결국 건립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문헌도서관에는 이러한 찬양문 3건이 소장되어 있다. 경남 전역을 조사해 보니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성공회 모금 활동 금지 기사(동아일보 1926. 5. 10.)

◇효행의 정려·비문은 시대가 변하여도 숭고한 것

국가 공인 정려를 받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효자의 행적 보고, 여론 조성, 청원 절차를 밟아야 했고, 국가에서도 엄격하게 검토하여 인정했다.

청원을 통하여 박효근처럼 비교적 빨리 정려를 받는 예도 있으나, 하진태의 경우에는 정려 결정까지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였다. 정려를 받게 되면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하는 ‘완문(完文)’이 뒤따르게 된다. 박효근의 경우 고택 입구에 정려 현판이 걸렸고, 하진태의 경우 정려각과 비석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 잡역을 면제받고, 추증을 통해 신분 상승도 가능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되자 효자 후손이 정려를 신청할 곳도, 승인해 줄 곳도 없게 되자 이러한 틈을 타 모성공회가 효자 인증을 대행하게 되었다. 찬양문을 받는다고 하여도 아무런 혜택이나 은전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비문을 세우는 것도 오로지 후손의 몫이었다. 이로 인해 비석도 세우지 못하고 강위성처럼 ‘찬양문’만 전하는 예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성공회는 효자의 선량한 효심을 이용하여 이들로부터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 효자를 두 번 울린 셈이다. 찬양문을 바라보노라니,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의 뻔뻔함과 효자의 효심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에 개탄하게 된다.

효행은 정려나 비문의 유무를 떠나 그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가 변하여도 변함없이 숭고한 것이다. 길가에 쓸쓸히 비를 맞고 서 있는 효자의 정려각, 현판, 비석을 볼 때 효자의 거룩한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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