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낫이 그립다
[경일춘추]낫이 그립다
  • 경남일보
  • 승인 2023.06.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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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수필가
이덕대 수필가


예전에 농사가 삶이었던 마을에서 낫질은 아이와 어른의 경계였다. 어떤 아이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면서 낫질을 배웠다. 낫은 날카롭고 예리하지만 낫을 잘 다루는 것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거친 숫돌에 갈다가 섬세한 숫돌에 마감 질을 한 낫의 번득이는 칼날은 섬뜩함을 넘어 차갑기 조차했다. 명품표식으로 대장간 낙인(烙印)이라도 명토 박아 나온 낫은 마을 자랑거리쯤은 되었다. 사람한테든 풀이든 낫을 휘둘렀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고 끝장을 본다는 뜻이며 또한 낫은 생명이자 죽음이요 자존심이자 힘이었다. 낫이 지나간 자리는 어떻게든 정리가 됐다. 벼나 보리는 거두어졌고 풀과 나무는 쓰러져 누웠다. 산과 들의 많은 것들이 낫 앞에서 버티기 어려웠다. 낫이 지나간 자리는 대부분 뿌리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다. 절대적 힘을 가진 도구지만 생명의 근원까지 멸절(滅絶)시키지는 않았다.

요즘 농촌에서 낫을 보기 어렵다. 낫이 사라진 곳은 잔인하다. 엔진과 연료통을 힘들게 둘러맨 백발노인은 굉음의 예초기를 돌린다. 순식간에 풀밭이 사라지고 처절한 절단의 냄새가 한 가득이다. 그래도 예초기는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이다. 칼날이 살벌한 풍경을 만들어 내지만 삶과 죽음을 분리할 뿐 종족 말살(抹殺)은 아니다. 예초기 마저 사용할 이 없는 늙은 시골은 제초제란 이름의 저승사자가 황량한 사막을 만든다. 제초제가 뿌려진 땅은 공포요 죽음이다. 풀벌레나 개구리는커녕 개미 한 마리보기 어렵다. 뜨거운 태양 아래 오로지 인간에게 필요한 것만 남은 밭과 들은 처절하고 기괴하다. 가축을 위해 논두렁 밭두렁에서 풀을 베던 낫질은 농사꾼의 부지런함이었고 천사의 빗질이었다.

아이의 낫질은 오히려 자연을 가꾸었고 어른 낫질은 바라는 만큼 집안 살림을 기름지게 했다. 낫질을 하다가 시들해지면 개울물 맑은 소에서 멱을 감고 풀밭에 낫을 던져둔 채 뭉게구름 핀 하늘을 보다 잠이 들었다. 낫질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우거진 풀숲 속으로 빛나는 햇살을 데려왔다. 스러진 풀은 향긋했다. 생명은 다음 생명, 다른 생명을 위해 즐거이 농부들의 풀 짐 위로 던져졌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잡초가 극성이다. 젊은이가 사라지면서 늙어버린 농촌은 낫도 예초기도 사라지고 오로지 제초제만 남아 황폐하고 쓸쓸하다. 혀를 끌끌 차며 제초제를 뿌리고 있는 농부의 말은 처연하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도 사라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잡초가 작물을 덮치는데 달리 도리가 없단다. 아이들이 논밭고랑의 풀들을 베어 가축먹이로 하고도 자연이 조화를 이루던 그 낫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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