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현장[9] 하익범의 ‘병록일기’
경남의 고문헌 현장[9] 하익범의 ‘병록일기’
  • 경남일보
  • 승인 2023.05.0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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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선비가에 전해오는 진정한 효의 모습
대곡면 단목리 마을 입구 효자문 '정려각'
사경헤맨 모친 병수발 아버지 효행 기록
효자 이야기는 무수히 전해오고 있으나, 효행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하익범이 기록한 ‘병록일기(病錄日記)’를 통해서 효자의 부모 병 간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진태 효자 정려문
◇서언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마을 입구에 ‘효자문’이라 쓰인 정려각이 서 있다. 지난해 진양하씨 창주공파 담산종중 하택선씨로부터 기탁받은 ‘병록일기’에 바로 이 정려각의 주인공 하진태(河鎭兌, 1737-1800)의 효행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진태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50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한 인물이다. 80세인 모친이 갑자기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하진태는 50여일 동안 극진히 병간호 했다. 하진태의 아들 하익범(河益範, 1767-1813)은 할머니의 병세, 아버지의 병간호 모습 등을 하루도 빠짐없이 꼼꼼히 일기로 기록했다. 분량은 2400여 자에 달하는 장편이다. 지면 관계상 요약해 소개하고자 한다.

 
병록일기(病錄日記)(고문헌도서관 소장, 경상남도 문화유산)
◇병록일기

나의 할머님은 80여 세의 늙은이다. 살이 빠지고 기력이 약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지께서 새벽에는 안부를 묻고, 밤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며, 세 끼 식사 올리는 일을 손수 하셨다. 1791년 10월 13일 아침에 할머니께서 갑자기 치통을 크게 앓아 입술이 퉁퉁 부어올랐다. 식사량이 대번에 줄었다.

16일 아침에는 몸이 불편하여 음식을 물리치고 이불을 덮고 몸져누웠다. 설사를 심하게 한 후 정신이 혼미하여 대변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버지께서는 편지를 보내어 형님에게 돌아오기를 재촉하고, 또 두 당숙에게도 알려 곁에 와서 머물게 하였다. 이를 보면, 초기부터 병환이 위중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가까운 친척들이 이날부터 집 안팎에 모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것도 이때부터다.

17일. 할머니께서는 소변을 자주 누었다. 한밤중에는 진흙 같은 대변을 누기 시작하였다. 머리 부분과 손발에서 열이 펄펄 나 정신을 잃고 혼미해졌다. 가끔 하품을 하기도 하셨다. 18일. 형님이 의원 강유운에게 가서 삼령 1첩을 지어와 복용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경황이 없어 앉았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하셨다. 입에서는 하늘에 호소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손을 비비고 발을 구르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이날부터 한밤중 인적이 없을 때 침실 뒤편에 나가 옥황상 제와 북두칠성에 기도하였다. 19일 아침. 숙부님이 의원 강사백에게 가서 물으니, 의원이 말하기를, “이같은 병에 의원이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왕진 하러 간들 무슨 도움이 되겠소”라고 하였다. “처방문을 구했으나 해당하는 약이 없는 것 같으니 어찌 약을 짓겠소”라고 말하였다. 왕진을 청하였지만 오지 않아 처방문만 겨우 구하여 왔다. 밤에 육미회양탕 1첩을 드시게 하였다. 병으로 열이 많이 올랐다. 약에 부자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2첩을 달였지만 복용하지는 않았다. 내외와 종들이 대문 안에 모여 지키게 한 것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20일. 밤이 되자 병이 더욱 위독하여 머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턱이 어긋나서 윗니와 아랫니가 맞지 않는 상태이고, 두 뺨과 광대뼈 주위가 모두 차갑고, 미음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셨다. 무릎부터 발끝까지 차가웠다. 매우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양동 숙부님은 흐느껴 울면서 문밖으로 나가 아들과 조카들에게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이날 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조카 및 부녀자, 계집종을 밖으로 나가게 하셨다. 양동 숙부님만이 옆에 계셨는데, 아버지께서는 조용히 돌아앉자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다. 피가 조금 나와 다시 손가락을 자르는데, 마치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오른손으로 혈맥을 누르자 선혈이 솟아 나왔다. 미음 반 그릇과 선혈 반

그릇을 담아 한 그릇을 채워 할머니 목에 부어서 남김없이 다 드시게 하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그날 저녁을 넘길 수가 있었다. 밤중에 대변을 보셨는데, 아버지는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셨다.

21일 오후. 병세가 더욱 위독해졌다. 두 뺨과 손발이 모두 차갑고, 코와 목에서 나오는 숨의 기운도 점점 차가워졌다. 거의 운명하실 정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께서는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종을 나가게 하였다. 두 당숙 어른 몰래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다. 첫 번째 자를 때는 피가 나오지 않았고, 두 번째 자를 때는 피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자른 뒤에야 선혈이 나왔는데, 세 곳에서 모두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미음에 타서 그릇에 가득 채워 할머니 입안으로 남김없이 부어 드시게 하였다. 얼마후에 몸에 온기가 차츰 돌아왔다.

이때 형님은 아랫방에서 쉬고 있다가 병상곁에 들어와서 아버지가 할머니 입안으로 미음을 부어 드리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주사(朱砂)를 미음에 탄 것으로 생각하였다가, 두 번째 손가락을 자른 것을 알고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제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몇 해 동안 병을 앓았고 허약한 체력이었는데, 연일 계속 어찌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그날의 정경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날 가까운 친척 내외가 모두 모였다. 양동 숙부님은 흐느껴 울면서 문밖에 나와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였다.

22일. 할머니 병세가 변함없이 위독하였다. 주위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또 대소변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알지 못하셨다. 24일. 이날 나는 비를 무릅쓰고 의원 강사백을 찾아가 왕진하게 하니, 의원이 진맥하고서 말하기를, “시험해 볼 약이 없네”라고 하였다.

25일. 앓는 소리가 여전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밤에는 가감보익탕 1첩을 드시게 하였다. 내가 천복에게 가서 길흉을 물으니, “길조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27일. 한열(寒熱)이 조금씩 일정해지고 음식도 조금 드시기는 하였지만,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이날 밤에 두 숙부님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여기에 있고 자식과 조카들도 모두 여기에 있으니, 번갈아 가며 밤에 간호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16일부터 거의 한 달간 아버지 홀로 밤새도록 병간호하였다. 29일. 오후에 두통과 몸에 열이 다시 올랐다. 발 부위에 붓기가 있었고, 소변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정신은 혼미한 상태였다. 한밤중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30일 그믐날. 아침에 삼 3돈을 넣은 속미음을 드시게 하였다. 열이 전날과 비교하면 조금 내렸으나 기침은 매우 심하였다. 이날 양동 숙부님이 천복에게 가서 물어보니, “불길하다”라고만 하였다. 11월 초하루. 기침은 한결 같았으나 열은 잠시 내렸다. 오후가 되자 앓는 소리를 또 내었다.

2일. 오후에 인삼 1돈을 넣은 양원죽을 드시게 하였고, 한밤중에는 인삼 1돈 반을 넣은 속미음을 드시게 하였다. 열증이 새벽에 이르러 마침내 그쳤다. 이날 저녁 아버지께서 목욕재계하고 몸소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축문을 지어 할머니의 남은 삶을 축원하였다. 제수를 갖추어 총 40번 절을 하였다.

 
하진태 효자 정려각
◇간곡한 마음

이날 밤에 비는 초저녁부터 시작되어 빗줄기가 물을 대듯 하였고, 병세도 더욱 위독해져 제사를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밤중에서야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으나, 병세는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반쯤 지내자 빗줄기가 더욱 급해져 갓 위에 빗방울이 물을 들이붓듯 하고, 등잔 속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종을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반종지의 등유에 빗물이 가득 찼지만, 일곱 개의 심지가 꺼지지 않고 환히 비추고 있었다. 40번 절을 올리는 사이에 우러러 기도하고 굽어 축원하였다.

한 번 절하고 한번 축원하는 것이 매우 더뎌 등잔 속에 물이 가득하였지만, 불빛이 꺼지지 않고 물기를 머금은 종이 역시 모두 다 잘 타서 하늘로 올라갔다. 북두칠성에 제사하기 전, 어느 날 저녁 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하기를 “어머님의 병환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의약과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면 나는 사당에 가서 내 목숨을 대신 바치기를 청하고 북두칠성에 머리를 조아려 축원하고자 한다. 그러니 축문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평소 문장을 짓는 공부에 소홀하였고, 또 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문자를 생각해낼 수가 없구나. 네가 나를 대신하여 축문을 지어라”라고 하셨다.

그날 저녁에 축문을 지어서 바치자, 아버지께서 말씀하기를 “문장은 그런대로 지었지만, 나의 간곡한 마음을 다 나타내지는 못하였구나. 내가 비록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급하지만, 나의 간곡한 마음을 다하여 문장을 지을 것이다. 너는 먹을 많이 갈아 빨리 글을 쓸 수 있게 준비하라”라고 하고서 베개에 엎드려 눈물을 닦았다. 혹 울기도 하고, 혹은 부르짖기도 하며 단숨에 축문을 지으셨다.

3일. 드디어 하늘에 기도하는 예를 그만두었다. 오후에 열이 다시 올라 어제와 병세가 같았지만, 조금은 차도가 있었다. 한밤중에 이르러 열이 내렸다. 8일. 이날 밤 접명고를 복용하게 하였더니, 비로소 편안히 잠을 주무셨다. 17일부터 여러 병세가 모두 조금씩 호전되는 기미가 있었다. 노병을 소생시키기 어려운 것은 고목에 싹을 나게 하는 것과 같았다. 처음 치통을 앓을 때부터 오늘까지 붕어, 미음, 닭즙 같은 것을 드셨는데, 오늘 오후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석화죽 한 그릇을 드셨다. 26일. 아버지께서 비로소 밤샘을 중지하셨다. 12월 2일 아버지께서 비로소 동쪽 방 숙소로 옮겨 주무셨다. 11월 16일부터 25일까지 날마다 죽 한 그릇을 드셨고, 26일부터 12월 2일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죽을 드시고, 낮에는 국과 면을 드셨다. 3일부터는 비로소 아침저녁으로 밥을 드셨고, 새벽과 밤에는 미음을 한 그릇씩 드셨다.

◇마무리

이 일기는 할머니의 병이 매우 위독하여 의원의 왕진마저 거절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가 할머니의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는 모습,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는 모습, 온갖 탕제로 보양했으나 병이 호전되지 않자 어머니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는 아버지의 정성을 아들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희귀한 고문헌이다.

이 기록에는 처방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한의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하진태의 효행은 지역민의 노력으로 왕에게도 알려져 1891년 효자 정려문과 동몽교관품계가 내려졌고, 1892년에는 마을 입구에 효자 정려가 세워졌다.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부모님이 병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보내고 간병인에게 병간호를 맡기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처럼 오로지 온갖 정성으로 부모님을 병간호하였다. 진주 선비가에 전해오는 ‘병록일기’를 통해 진정한 효행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진양하씨 창주공파 담산종택(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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