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봄날의 애상(哀想)
[경일춘추]봄날의 애상(哀想)
  • 경남일보
  • 승인 2023.03.0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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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의령사무소장
박성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의령사무소장


봄은 꽃피는 생명의 소리로 온다. 담장 밑 개나리꽃이 지천에 피고, 진달래 매화가 가장 먼저 봄을 전해 온다. 나무는 땅속 깊게 뿌리를 내려 수액을 빨아올리고, 가지에는 연초록 잎이 움 틀 것이다. 집집마다 흐려진 창을 닦고, 베란다 화분을 정리하는 등 봄맞이 청소를 하는 모습들은 변한 게 없다. 바야흐로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다.

아지랑이 봄빛 속에 서럽게 피어오르는 봄의 환(幻)/이 봄은 꼭 할머니를 닮았다/뉘엿뉘엿 넘어가는 기나긴 봄날에 산속 깊이 그렇게 참꽃은 말없이 혼자서 피고 진다. 참꽃은 말없는 우리 할머니를 닮았다/누나야 우리는 할머니의 굽은 등허리에서 참꽃 먹으며 자랐다/아 시리도록 슬픈 이 봄날의 환을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대학 때 학보사 신춘문예에 출품한 습작이다.

요즘 바깥으로 나아가면 매화꽃과 참꽃이 절정이다. 홍매화는 그 자태가 매우 화려하다. 반면 참꽃(진달래)은 늘 수줍은 색시같이 부끄러움이 많다. 옛날에는 꽃을 따서 술을 담그고 부침개에 올려 식용으로 애용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진달래는 참꽃이고 이와 비슷한 철쭉은 먹을 수 없다며 개꽃이라고 불렀다. 내가 살던 고향은 어디서나 봄꽃 지천이다. 그래서인지 혼자서 통학하던 때도 조금은 덜 외로웠고 좀 더 감수성이 많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오래 전 봄날, 꽃길을 따라 떠났다. 할머니 생전, 손에 이끌려 산으로 들로 향하던 당시의 기억은, 그렇게 구차하고 비루했던 시절로 각인돼 지우고 싶었던 한 장면이 돼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리워진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봄은 이렇게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지만 이유 없이 무력해지는 계절이다. 새 생명이 탄생하고 저마다 분주한 봄날, 이 밝은 세상을 보노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 엄습한다. 봄이 내보내는 쉴 새 없는 삶에 대한 메시지…, 그 앞에 뒤늦게 답을 찾으려 책을 뒤적거린다. 어느 산기슭에 무리지어 핀 진달래가, 연한 꽃잎들이 속살거리다가, 난분분하게 흩날리며 빛의 속도로 항거하며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 이 봄을 환영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낡은 거울을 닦아보고, 늘어난 허리치수도 줄여 가벼운 몸으로 이 봄을 당당하게 맞이하자. 나를 세우지 못하고 햇살 아래 바스락거리며 나를 부추기던 봄의 교향곡들이 아득히 멀어지노라면 꿈같은 나의 봄날도 허무하게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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