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터의 무늬, 사람 무늬
[경일포럼]터의 무늬, 사람 무늬
  • 경남일보
  • 승인 2023.03.0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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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을 가리켜 사회(社會)라고 한다. 지역사회라는 낱말이 자연스럽듯이 지역과 사회는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사회는 일본 지식인들이 19세기 말에 만든 한자어다. 영어의 ‘소사이어티(society)’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창안한 절묘한 역어다. 종묘사직 할 때의 사(社)는 토지의 신이다. 이 토지의 신이 점지한 곳에 모인(會) 공간에 장소성의 지위를 부여한 말이 다름 아닌 사회인 것이다.

나는 최근에 지역사회의 문화에 관한 저서 한 권을 냈다. 책은 양장본, 화가의 표지화, 6백 쪽 가까운 분량의 좋은 지질로 된, 우선은 보기 좋은 책이다. 책의 제목은 ‘경남을 인문하다’다. 탈문법적인 제목이긴 하지만, 의미론적으로는 뜻이 매우 명쾌하고도, 적확하다. 그 동안 모아놓은 내 원고 중에서도 경남에 관련된 원고, 또 이 중에서도 특별한 주제에 묶이지 아니한 것들을 묶어내었다. 경남은 지역의 한 이름이다. 모든 게 수도권으로 치우쳐가는 중앙 집중 식의 가치와 관점에서 볼 때, 지방 소멸의 이 시대에 그 이름은 왜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이다. 지금은 인문학 역시 백척간두의 위기, 초미의 위기에 서 있는 시대다. 지역이건 인문이건 우리나라와 모든 학문의 기반을 이루는 평평한 모체라는 점에서 긴요한 플랫폼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게 저간의 실정이다.

경남을 포함한 각 지역은 대한민국의 이른바 ‘터무니’다. 우리는 터무니가 있네, 없네 하는 말을 자주 쓴다. 터무니가 근거이듯이, 지역의 터무니는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삶의 근거이다. 그런데 터무니의 어원은 놀랍게도 ‘터의 무늬’이다. 몇 년 전에 TV채널을 돌리다가 건축가 승효상의 대담을 잠깐 보았다. 이때 그가 터무니는 터의 무늬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 얘기가 몇 년 동안에 긴가민가했었는데, 내가 근래에 문헌을 찾아보니 맞는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터무니가 한자어 ‘기문(基紋)’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문이 터의 무늬라면, 인문(文)은 글자 그대로 볼 때 인문(紋), 즉 사람의 무늬이다. 글월 문 자와 무늬 문 자는 같은 어원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그러니까 나의 책 제목인 ‘경남을 인문하다’는 터의 무늬와 사람 무늬를 함께 살펴보고, 또 더불어 헤아려 본 것의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요컨대, 이 책은 경남 지역 전반에 걸쳐, 미시의 역사, 연행과 예술, 인물 재조명, 방언 및 문학 등에 걸쳐 쓴 원고를 모은 것이다. 내가 진주에서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진주에 관한 원고가 가장 많다.

고등학교 시절에까지 부산에서 성장한 나는 삶의 근본이나 기반이 약했다. 마흔 한 살 때에 이르러서야 경남과 진주가 내 삶의 근본이요 사회적인 기반이라고 여겼다. 나의 장소에 대한 애정, 이른바 토포필리아가 경남 지역의 인문학적인 과제 탐색을 촉발하게 했던 것 같다. 나는 비로소 경남이란 삶의 플랫폼 위에, 지역의 터무니에다, 뚜렷하고도 아름답고, 또 인간다운 터무니, 터의 무늬를 새겨 넣을 수 있었던 거다.

터의 무늬에도 실용적인 가치와 인문적인 가치가 있다. 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과거에 몇몇 명의 자산가들이 사막에다 은을 캐는 광촌으로 인구 8000에 지나지 않았던 라스베이거스에 터의 무늬를 새겨 관광과 카지노 등의 향락적인 세속도시를 건설한 경우이다. 이 책이 한 달이 훌쩍 넘어도 주문 한 권 들어오지 않고 있지만, 여기에 내 삶의 그림자와 인생 경험이 녹아있고, 지역의 인문적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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