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6]월정마을 이안장암과 족보바위를 찾아서
경남의 고문헌 [6]월정마을 이안장암과 족보바위를 찾아서
  • 박성민
  • 승인 2023.02.21 16: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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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바른 곳에 아담한 바위 하나 ‘이안장암’
마을의 역사를 보관하는 ‘동안’
동안을 보관하는 바위 이안장암
의령·산청 등 도내 곳곳 족보바위
우리 선현들은 고문헌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노력을 기울였을까. 높은 절벽에 구멍을 뚫어 고문헌을 그 속에 숨긴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이번에는 월정마을 ‘이안장암’과 족보바위를 통해 그 실체를 알아보고자 현장을 찾아 나섰다.



◇진주 월정마을 이안장암

진주시 월아산 아래 진성면 월정마을 양지바른 곳에 아담한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바위에는 ‘이안장암(里案藏巖)’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간암 박태형이 1895년에 지은 장이안기(藏里案記)를 살펴보면, 이 바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월정마을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실시한 마을 계회(契會)와 관련된 역사기록인 ‘동안(洞案)’과 이 마을에 사는 10개 문중의 족보 등 20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의 난(1894) 때 동안이 거의 훼손될 뻔하였는데, 이웃집에 옮겨 봉안하여 간신히 화를 면했다. 사람들은 마을과 문중의 역사를 지켜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바위를 구하여 마을 앞에 가져다 놓고 그 속에 보관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결국, 이 안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월아산에서 바위 하나를 굴러와 4개월 만에 설치를 완료했다. 사람들은 마을의 동안을 보관하는 바위라는 의미로 이 바위를 ‘이안장암’이라고 불렀다.

바위 아래에 네모난 구멍을 판 뒤 옻칠을 한 오동나무 궤짝 속에 동안과 족보를 넣고, 습기 제거를 위해 숯도 함께 넣었다. 그리고 매년 음력 3월 3일이 되면 10개 문중 대표가 모여 바위를 둘러보고 문헌의 영구 보존을 축원했다. 그리고 그날은 문중별로 순서를 정하여 돌아가며 모인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마을의 전통이 생겨났다.

그리고 30년에 한 번씩 문중 대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바위를 개봉하여 보존 상태를 살폈다. 동안을 새로 옮겨 적고, 새로 태어난 후손이 있으면 족보를 다시 만들어 바위 속에 넣었다. 족보를 넣을 때도 문중별로 차례대로 순서를 정하여 넣음으로써 보존에 형평성을 기하였다. 이러한 고문헌 업데이트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바위 속에 보관해온 고문헌 20점 중 ‘동안’ 5점은 조선시대 향촌사회를 운영하던 질서와 사회상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2년 4월 4일은 이안장암 바위를 개봉하는 날이었다. 월정마을 주민이 모두 마을회관 앞에 모였다. 오래전에 고향을 떠난 인사도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참석하였다. 정자나무 아래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리고, 고유제를 지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위가 개봉되었다. 바위 속에서 궤짝 하나가 나왔고, 궤짝 속에는 고문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나 궤짝 속에 숯을 넣어 부패를 막고자 노력했지만, 고문헌은 이미 습기를 머금어 심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방법으로 고문헌을 길이 보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 결국 2012년 8월 바위 속 고문헌 원본을 꺼내어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에 영구기탁했다. 고문헌도서관에서는 동안과 족보 복제본을 제작하여 바위 속에는 다시 넣어 보관하게 하였다.

 
장이안기
월정마을 이안장암


◇의령 송산마을 족보바위

의령에도 족보를 보관하는 바위가 2곳이 있다. 지난 11일 의령을 방문했다. 진주에서 의령군 유곡면을 찾아가려면 합천 쌍백에서 한태령을 넘어가는 길이 빠르다. 한태령을 넘는 구불구불한 길은 군데군데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웠다.

첫 번째 바위는 유곡면 송산마을 송산교회 옆 큰 느티나무 아래에 있다. 앞면에는 ‘縣北柳谷 慶州金氏藏譜誌’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松隱亭’이라 쓰여 있다. 경주김씨 족보를 보관하는 바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주민에게 바위의 유래를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하였다.

너럭바위로 사방 벽을 만들고, 큰 덮개돌로 위를 덮어서 지붕을 만들었는데, 고인돌형태를 하고 있었다. 높이 1,5m, 너비 1m 남짓 되는 바위였다. 덮개돌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니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경주김씨 족보 4질을 네 곳의 사고에 분산 소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족보바위는 아직 한 번도 개봉된 적이 없어, 바위 속에 족보가 아직 들어있는지 문중 관계자도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필자는 들어있을 것으로 본다.

 
의령 송산마을 족보바위


◇의령 덕천리 족보바위

의령의 역사서인 ‘의춘지’를 살펴보면, 유곡면 덕천리에 자암정(紫巖亭)이 있는데, 기암절벽에 강씨와 남씨 두 문중의 족보를 넣어 둔 바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곡천농촌체험랜드 입구에 차를 세웠다. 주변 야영장에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야영객의 텐트가 즐비하다. 유곡교 아래에는 한우산에서 발원한 물이 찰비계곡을 지나 이곳으로 흘러가는 유곡천이 있다. 강변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오른쪽 끝자락에는 자암정이 자리하고 있다. 자암정은 강경승(1577-1633)이 은거하며 학문에 힘쓴 곳이다. 석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중간지점에 인위적으로 만든 네모난 구조물이 보인다. 강물로 인하여 가까이 가서 살펴볼 수가 없다. 아직 드론을 갖추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직 개봉이 안 된 상태다.

 
덕천리 족보바위


◇창원 오서리 부흥암

창원시 진전면 오서리에도 족보를 감춘 기록이 있다. 초산 이상돈이 지은 ‘부흥암기’의 기록이 자세하다.

부흥암은 진전면 서쪽 죽곡의 동쪽에 있는데, 깎아지른 높다란 벼랑은 사람들이 부여잡고 올라갈 수 없다. 속칭 ‘부엉이바위’라는 것이다. 몇 년 전 포악한 무리가 남쪽을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들이 지나간 고을은 쓸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인근 권씨들이 모여 서로 모의하기를, 난리에 문헌이 불타 쉽게 소실되니, 험난한 곳 하나를 정하여 별도로 문중 역사를 감추어 소실을 미리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원근에서 따르는 자가 그 바위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구멍을 뚫었다. 바위 가운데에 조그만 궤짝을 넣어 문헌을 감출 수가 있었다. 밖에서 돌문을 달아서 닫고 사다리를 치워버렸다. 우러러 절벽을 바라보면 위에 ‘부흥암(復興巖)’ 세 글자를 새겼을 뿐이다. 궤짝에는 권씨를 비롯해 아홉 성씨의 족보를 넣었다. 바위 이름을 ‘부흥(復興)’으로 붙인 것은 대개 ‘부엉이’라는 소리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18일 이른 아침 오서리 부흥암을 찾아갔다. 부흥암은 단풍에 물든 벽오동 나뭇잎에 가려 있고, 낙하 방지용 그물망이 높다란 절벽을 감싸고 있어 석실을 찾기가 어려웠다. 벼랑 앞으로는 2차로 도로가 지난다. 절벽 옆에는 올망졸망한 비석 3기가 서 있는데, 자세히 읽어 보니 여기는 옛날 허씨가 낚시하던 연못이었다. 도로가 생기기 전 여기는 접근이 어려운 요새지였다. 그러나 부흥암 돌문이 열려 있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족보는 다른 곳에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오서리 부흥암


◇산청 왕산 족보바위

‘김해김씨왕산세가석장대동보’라는 서명의 족보가 있다. 왕산이면 산청 구형왕릉이 있는 곳이고, 석장이라면 바위 속에 감추었다는 뜻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산청 왕산에서 나온 김해김씨 족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12월 24일. 김해김씨 족보를 감춘 산청 왕산 구형왕릉의 석실을 찾아 나섰다. 여름에는 숲이 우거져 찾기가 어려우므로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에 찾아 나선 것이다. 석실은 구형왕릉 맞은편 가파른 절벽에 있었다. 절벽은 오르기도 어렵고, 사진을 찍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온통 가시에 찔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석실은 왕릉 앞쪽 절벽에 세로 70cm, 가로 40cm의 석문 두 개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석실에서 족보, 칼, 제기, 갑옷 등이 나왔다고 한다.

 
구형왕릉 족보바위


◇결론

우리 선조들은 고문헌을 바위 속에 감추어 길이 전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을의 자치 규약인 동안과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족보였다. 바위 속에 고문헌을 숨겨 도난이나 훼손을 방지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고문헌은 온습도가 맞지 않으면 부패한다. 바위 속 고문헌은 습기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었다. 바위 속에 고문헌을 숨기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고문헌을 소장한 문중을 방문해 보면 장롱이나 궤짝 속에 꼭꼭 숨겨두고 잘 보여주질 않는다. 종손이 연구기관에 기증하고자 하면 방손들은 종손을 꾸짖으며 이를 만류한다. 그러다가 불타고 도난 맞은 뒤 탄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선현들이 고문헌을 남기는 목적은 후세에 널리 읽혀 연구되기 위해서다. 고문헌이 읽히고 연구되지 않게 하는 것은 고문헌을 남긴 선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지면 고문헌을 보존·관리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고문헌을 국가 기관에 기증하여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고문헌을 남긴 분에 대한 도리이다. 그래야만 문중의 고문헌도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이안장암에서 나온 고문헌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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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5 14:30:52
흥미로운 기사라 정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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