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바람 부니까, 살아야 해
[경일포럼]바람 부니까, 살아야 해
  • 경남일보
  • 승인 2023.02.06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폴 발레리(1971~1945)의 ‘해변의 묘지’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명시다. 그의 고향은 남프랑스의 조그맣고 한적한 항구도시인 세트다. 프랑스 제2의 대도시인 마르세유에서 서쪽으로 가면, 유명한 화가 고흐가 죽기 전에 머물면서 마지막 예술혼을 쏟아낸 곳으로 유명한 아를이 있고, 여기를 지나서 또 몽펠리에를 거치면 그의 고향에 이를 수 있다. 나는 아를, 칸, 니스 등의 남프랑스를 간 적이 있지만, 이곳으로 방향을 틀지는 못했다. 지중해를 굽어보는 산비탈에는 경남 남해의 다랑이 논 같이 계단식으로 된 공동묘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의 소재가 된 그 해변의 묘지다. 그 역시 고향 해변의 묘지에 묻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성장했다. 그는 이 바다가 자신에게 현존의 형태라고 했다. 바다는 미분화된 일순(一瞬)의 양태로 현존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바다와 하늘과 태양에 대한 무의식적인 숭배에 전념했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바다의 심연은 영혼의 깊이를 상기하고, 반짝이는 수면은 명료한 의식을 늘 연상시켰다. 열 페이지 정도의 긴 시편인 그의 ‘해변의 묘지’ 중에서도 제24장인 종장(終章)이 유명하다. 연극이라면 장엄한 종막이요, 오페라로 치면 피날레를 장식한 마지막 악장이다. 지면의 성격으로 인해 산문의 형태로 인용해본다.

“바람이 불어온다……살아봐야겠다! 거센 마파람이 내 책을 펼치고 또 덮고, 산산조각의 물결이 바위에서 솟구치려 하네! 날아올라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수어져라, 물결이여……”

인용한 부분의 첫머리인 두 문장은 무척이나 유명하다. 정확한 내용이 뭔지 모르면서도 문학청년의 마음을 달뜨게 했던 금언이었다. 바람이 불어온다. 살아봐야겠다. 발레리는 왜 기상천외의 이 표현이 마음에 꽂혔을까? 지중해성 기후의 남프랑스에는 여름에 비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비바람이란 건 더욱 없다. 이런 여름날이면, 독서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답답한 일상이 마치 남프랑스의 후덥지근한 여름날, 바람 없는 나날 같다. 대신에 겨울은 간혹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분다. 남프랑스의 겨울은 무척 온화하다. 발레리가 상징주의 시인이니까, 바람이라는 단어에는 무언가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리라. 예컨대, 피를 맑게 해준다는 것의 상징이랄까, 혹은 정신과 의식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의 상징이랄까? 프랑스의 전문 시학자들에 의해, 이 두 문장은, 쇄신의 감정, 인생에서 열려진 열광적 감정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는 삶과 죽음에 관한 명상의 시편이다. 그에게 있어서 지중해가 삶의 상징공간이라면, 공동묘지는 죽음의 상징공간이다. 바다와 묘지 사이에 해변이 놓인다. 해변은 경계선이라기보다 연결고리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변은 발레리적인 ‘우주감각(sensation d‘univers)’의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고리. 순환의 환(環)이 바로 고리이다. 고리는 긍정적으로 쓰이거나 부정적으로 쓰인다. 혈액순환, 자연환경은 좋은 뜻이요, 고리백정, 정경유착의 악순환, 범죄의 연결고리는 나쁜 뜻이다. 내 생각을 한번쯤 수정해볼 때, 내 시선을 한번쯤 옮겨다볼 때, 내 습관을 한번쯤 바꾸어볼 때,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성찰 없는 삶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라고 하는 악순환으로 교란된 시대, 죽음으로 상징화된 시대를 건너오고 있다. 이제는 정말 막바지일까? 우리에게 새로운 선순환의 바람이 불어온다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이제는 더 잘 살아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