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51)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51)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12.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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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이야기지만 아메리카나 대입 시험에는 답 맞히기보다 에세이 쓰기가 더 중요하다고 하죠. 경쟁률이 높은 학교일수록 에세이 비중이 높다고 합니다. 지적 호기심과 창조력을 중요시한다는 거지요. 시험이라는 것이 다 암기 수준을 알아보는 건데, 에세이는 인간의 여러 구성요소를 가늠하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죠. 만점은 말하지 않지만 에세이 한 편은 그의 사상과 됨됨이를 털어놓지요.

‘본인이 살면서 겪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에 대해서’ 이런 주제들이 ‘대중 앞에서 연설한다면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가?’ 쪽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합니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주관에서 객관으로, 개인 잡사에서 사회문제로 옮겨 그 창의력을 짐작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앞날의 인물, 될성부른 나무를 찾으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저 나라 대학들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네요.

우리가 쓰는 수필을 신변잡기라고 폄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는 이의 눈이나 쓰는 이의 눈이나, 거기서 거기여서 그렇거니 합니다. 선입견에 잡혀있는 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신변잡기로 찍고, 지이들은 “내 체험을 쓴 거야”로 만사형통하고 마는, 그런 이들이 많으니까요.

세상에 체험 없이 쓸 수 있는 글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빙의라도 돼봐야 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화자나 주인공이나 개인의 역사를 나열하는 건데, 지나치게 자기 것으로 오글트리면 신변잡기가 됩니다. 유독 수필에 신변잡기가 많아 보이는 까닭은 남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으려는 군자연들이 수필지이에 많아서 그럴 겁니다. 주의(主義)가 뚜렷하지 않고 주장이 빈약해서 인생은 마냥 태평해 보이고 전달되는 메시지가 안 보이지요. 태도는 점잖고요. 글지이에게 군자연은 오만을 드립니다.

내가 겪은 일들은 내 렌즈에 찍힌 한 장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이 사회를 내다보는 또 다른 렌즈가 되지요. 이 렌즈를 통해서 사회의 한 장면을 여러 사람이 보게 하는 거지요. 사회라는 파노라마에서 내가 찾아낸 한 장의 사진, 이것이 이름표를 달고 나온 한 편의 에세이·수필입니다. 내 렌즈로 찍은 의미가 사회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이 되는 거니까, 보는 이는 생각해야 하지요. 생각 없이 보면 못 보게 되고 생각하지 않고 보면 안 보이니까요.

“그대가 빛을 비추어주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있습니다. 글은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글은 독자에게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슈가 있어야지요. 이슈가 마니아를 만듭니다.

말꽃글은 사상의 마니아가 아니라 아름다운 감성을 공유하는 마니아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상이 내포되지 않은 아름다움은 물기 없는 조화와 같아서 음미하게 하지 않습니다. 꽃에 색깔만 곱고 향취가 없다면 누가 숨을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감겠습니까?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욕심을 갖는 건 사치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살이 한 자락 곱게 그려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바지하는 심정으로, 그런 마음으로 즐겁게 쓰는 거지요.

계절은 부지런도 해 이 해가 가고 다시 새해가 오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도 부지런히 말꽃을 피우신 분들, 읽으신 분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광야에 서신 이육사 선생님처럼 새해에는 온 세상에 글꽃 향기를 날려 사람들 가슴 가슴이 아름답고 화사한 꽃으로 피시기를! 고맙습니다. 이 해 마지막 날 제야의 종소리가 은은할 것입니다.

‘참수필짓는이야기’·‘한그루나무처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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